◎때론 ‘권력심복’ 때론 ‘소통령’/초창기 정치인朴정권 군·경70년이후 관료주류.이기붕씨 등 자유당인물 4·19때 자살등 최후비참/김현옥·양택식씨 화려한 치적불구 불명예퇴진.김상철씨 7일 최단명… 민선들어 위상 더 높아전국 대비 인구 22.2%, 국내총생산 23.7%, 광업·제조업체수 20.0%, 은행돈 49.2%, 소득세 49.9%, 법인세 65.9%, 자동차 22.7%, 전화 27.2%…. 한해 예산 9조8,087억원(98년·정부예산의 7.8%). 서울의 비중을 나타내는 지표들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도가 이처럼 정치 행정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분야의 중심지로 군림해온 예는 찾기 힘들다. 국방력만 없을 뿐, 가히 「서울공화국」이라 할만하다. 이 때문에 서울시장은 여느 단체장과는 달리 장관급으로 국무회의에도 참석한다. 민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정치적 무게를 더해 「소통령(小統領)」에 비유되기도 한다.
서울시장에 실린 무게는 이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대표적으로 4·19혁명을 전후한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섰던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허정(許政) 과도내각수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모두 서울시장 출신이다. 그밖에도 대부분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거나, 이 자리를 거쳐 정·관계 요직에 올랐다. 민선시장으로 경제부총리(조순·趙淳)와 국무총리(고건·高建) 출신이 잇달아 당선된 것도 서울시장 자리의 「파워」를 새삼 실감케한 대목이다.
그러나 모든 파워포스트가 그러했듯이 이 자리 역시 뒤틀린 정치사의 음영이 깊게 드리워져있다. 최고권력자의 절대적 신임없이는 오를 수 없었고, 그만큼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가족과 동반자살한 이기붕씨를 비롯, 자유당 시절 서울시장의 상당수는 4·19혁명이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부정축재자로 몰린 고재봉(高在鳳)씨는 9년간의 법정 투쟁끝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 79년 부인과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임흥순(任興淳)씨는 퇴임직후 3·15부정선거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데다 장면(張勉)저격사건에도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시는 복마전(伏魔殿)』이란 취임 일성으로 유명한 김상돈(金相敦)씨는 첫 민선시장이라는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혼란과 잇따른 대형화재로 흉흉한 민심에 휘말려 소신을 펼쳐보지 못한 채 5·16쿠데타로 물러났다.
서울시장을 거쳐간 인물은 초대부터 현 31대까지 모두 28명(연임·중임 3명). 초창기엔 정치인이 주류를 이룬 반면, 박정희(朴正熙)정권이후에는 군·경찰 출신이 득세했다. 윤태일(尹泰日) 김현옥(金玄玉) 구자춘(具滋春) 박영수(朴英秀) 박세직(朴世直)씨 등 5명이 군출신, 정상천(鄭相千) 염보현(廉普鉉)씨 등 3명이 경찰 출신이다. 70년대이후엔 행정관료쪽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가면서 김용래(金庸來) 고건 이상배(李相培) 이원종(李元鐘)씨 등 고시출신이 대거 등용됐다.
이처럼 역대 시장의 출신 성분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지만, 권력의 그늘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9개월로 비교적 안정된 편이나, 1년 미만 9명, 1∼2년 9명, 2∼3년 5명, 4년 이상 5명으로 편차가 크다. 단명도 많고, 장수한 예도 적지 않다는 얘기인데 어느쪽이든 정치적 영향이 컸다.
문민정부 첫 시장 김상철(金尙哲)씨는 그린벨트 무단훼손이 드러나 7일만에 옷을 벗어 역대 최단명을 기록했다. 40대 중반에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문민정부의 야심작이라 할만한 그는 문민정부 개혁조치 1호인 재산공개 파동에 휩쓸려 도중하차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로 불명예 퇴진한 이원종씨에 이어 발탁된 우명규(禹命奎)씨는 유일한 기술직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성수대교 건설당시 책임자로 밝혀져 12일만에 옷을 벗었다. 최단명 3호는 수서비리사건으로 53일만에 물러난 박세직씨다.
최고권력자의 두터운 신임으로 장수를 누렸던 이들의 말로(末路)가 불운했던것도 이채롭다. 「불도저시장」으로 불린 김현옥씨는 재임 4년간 숱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오늘날 서울의 기본틀을 만드는 업적을 남겼으나, 자신의 작품인 와우아파트 붕괴로 몰락했다. 뒤를 이은 양택식씨도 4년 넘게 재임하며, 김씨가 벌여놓은 각종 개발사업의 뒷마무리를 무리없이 해냈으나 74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저격당한 8·15 경축행사를 주최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80년대 이후로는 유일하게 4년넘게 장수한 염보현씨는 퇴임후 5공비리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다.
반면 고졸 학력으로 서울시장을 거쳐 건설부장관까지 지낸 입지적인 인물 김성배(金聖培)씨, 「행정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며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김용래씨, 최연소 도지사 출신으로 「행정의 달인」이란 별칭을 얻은 고건씨, 「열심히 일하다 꽃병을 깨뜨리더라도 솔선수범하라」는 이른바 「꽃병론」으로 유명한 이상배씨 등 정통행정관료 출신과 「일하기 위해 태어나 일하기 위해 산다」는 신념을 실천한 4선 의원 출신의 이해원(李海元)씨는 정치권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울시 행정기틀을 다지는데 주력, 무리없이 임기를 마쳤다.
임명제 마지막 시장인 최병렬(崔秉烈)씨는 「최틀러」라는 별명에 걸맞게 특유의 추진력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원만히 수습했으나 퇴임을 불과 하루 앞둔 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맞아 7월1일 0시 이슬비 내리는 사고 현장에서 조순씨에게 시장직을 인계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95년 민선시대를 맞이하면서 서울시장의 위상은 한층 격상됐다. 그러나 민선1기에 야당 시장으로 기대를 모았던 조순씨는 정치에 뛰어들면서 시장직을 포기, 유권자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오점을 남겼다. 이 때문에 강덕기(姜德基) 행정1부시장의 시장 직무대리 체제가 9개월 넘게 유지됐다. 최병렬씨와 맞붙은 6·4선거에서 승리, 8년만에 다시 민선2기 서울호를 떠맡은 고건 시장은 그래서 더욱 어깨가 무겁다. 그는 임기중에 21세기를 맞는다. 그가 공언한대로 IMF난국을 헤치고, 양적인 팽창만 거듭해온 수도 서울을 내실을 갖춘 「세계적 도시」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지 두고 볼 일이다.<이희정 기자>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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