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효율… ‘행정 뼈대’ 46차례 수술/11부4처로 출발/3共 ‘경제행정’ 표방 기획원·건설부 등장/5共 ‘작은정’` 시도 6共 다시 ‘큰정부’로/문민땐 통폐합 이어 현재 17부2처16청우리나라 정부조직은 1948년 건국이후 50년동안 46차례나 변천해왔다. 13개월에 한번꼴로 정부조직법이 개정된 것이다. 신생국가의 시행착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급변을 거듭해온 반세기 역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50년대까지는 독립과 건국을 공고히 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를 위해, 60년대와 70년대에는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조직개편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또 80년대 조직개편은 민주화와 개방화, 사회복지에, 90년대이후에는 국가경쟁력및 민간부문의 자율성 제고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제1공화국은 중앙행정기관을 11부4처로 구성했다. 11부는 내무 외무 국방 재무 법무 문교 농림 상공 사회 교통 체신부였으며 4처는 총무 법제 기획 공보처였다. 첫 개편은 건국 이듬해인 49년3월의 보건부 신설이었다. 또 54년 헌법개정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되고 대통령제가 강화되면서 55년 정부조직을 12부3청으로 전면개편했다.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행정권이 국무원에 소속되면서 정부조직이 60년 전면개편됐다. 1원12부1처3청으로 구성한 제2공화국의 정부조직은 경찰의 중립확보를 위해 공안위원회를 구성하고 원자력원을 신설했다.
61년에 발족한 제3공화국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재건을 위해 경제관계조직을 늘렸다. 경제기획원을 신설하고 부흥부를 건설부로, 부흥위원회를 경제장관회의로 각각 개편했다. 노동청 철도청 국세청 등 집행부서인 청도 대거 신설했다. 제3공화국의 정부조직은 70년에 2원13부4처12청으로 정비됐다. 기획원과 각부처의 기획관리실를 신설하는 등 계획적인 국가관리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다. 72년 유신체제와 함께 등장한 제4공화국은 일사불란한 국익추구체계와 관료의 사회·경제분야의 선도적 역할을 강화했다. 또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업진흥청 공업단지관리청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특허청 동력자원부 등을 잇따라 신설, 78년에는 2원14부4처14청으로 정비됐다.
81년에 시작한 5공화국은 집권초에 정부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등 「작은정부」구현을 시도했다. 취약한 정통성 때문인지 복지와 사정, 체육관련 조직을 강화했다. 노동청의 노동부 승격과 체육부 신설 등을 거치며 2원16부4처13청으로 정리됐다. 88년에 출범한 6공화국은 큰정부를 부활시켰다. 3저호황에다 민주화 개방화 지방화 등 신행정수요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환경청이 환경처로,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승격되고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나뉘는 등의 개편을 거쳐 2원16부6처15청으로 정립됐다.
93년에 출범한 문민정부는 작은정부를 역설하며 두차례의 대형개편을 단행했다. 출범직후에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를 문화체육부로,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상공자원부로 통합했고 94년에는 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합쳤다. 말기에는 해양수산부를 신설, 2원14부5처14청이 됐다. 재경원같은 공룡부처를 출현시켜 「국제통화기금(IMF)대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는 작지만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부총리제를 폐지, 재경원과 통일원을 재경부와 통일부로 개편하고 내무부와 총무처를 행정자치부로 통합, 17부2처16청으로 재편했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부처조직의 실효성이 떨어짐에 따라 기획예산처를 신설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2차 개편을 이르면 연내에 단행할 계획이다.<김경철 기자>김경철>
◎공무원 현황/‘군살 公僕’ 20만명서 93만명으로/건국 초기보다 4.7배/한때 ‘프라이드’ 상징/이젠 구조조정 한파
공직사회는 60·70년대의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팽창했다. 행정수요가 급증한데다 정부주도의 경제사회개발작업이 추진됐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당시 약20만명이던 공무원수는 62년에 25만여명에서 70년에는 41만여명으로, 79년에는 56만여명이 됐다. 그리고 올3월말 현재 93만여명으로 건국초기의 4.7배로 증가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은 프라이드(Pride), 파워(Power), 프로모션(Promotion) 등 「3P」를 누릴 수 있었다. 국가발전의 견인차라는 자부심(프라이드)과 민(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파워)에다 자리보전은 물론 승진(프로모션)까지 보장됐다.
그러나 70년후반 극심한 불황과 함께 정부 주도의 고도성장정책에 대한 반성이 나오면서 작은정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정권마다 집권초기에 작은정부 구현을 들고 나왔다. 82년 공무원수가 건국이후 최초로 감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지만 효율적이고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역대 정권의 「군살빼기」는 결과적으로 번번이 실패한채 공무원의 사기와 충성심만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공무원수는 87년에 70만명으로 늘어났고 94년에는 90만명을 넘어섰다.
한국행정연구원이 95년에 공무원 1,2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무원 인식조사결과에서 이같은 부작용을 읽을 수 있다. 응답자의 약30%가 낮은 보수, 승진정체, 권위적 분위기, 취약한 업무환경, 인사의 불공정성 등을 이유로 공직생활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약46%는 공무원이 무사안일하다고 자평했다.
국민의 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강력하게 정부구조조정을 추진중이다. 건국이후 최초로 공무원의 봉급을 삭감하는 한편 대대적인 「공무원퇴출작업」도 벌이고 있다.
3월 현재 공무원수는 총 93만4,247명이다. 행정부 공무원이 총91만6,265명으로 전체 공무원의 98%이며 이 가운데 정부가 임명한 국가직은 55만9,063명, 지자체가 임명한 지방직은 35만7,202명이다. 사법부와 입법부는 각각 1만2,078명과 3,346명이다.
또 공무원의 주종인 일반직이 31만1,753명이고 특수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특정직이 41만41명, 기능직이 18만8,033명이다. 일반직에서는 7급공무원이 8만9,79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8급 7만7,069명, 6급 7만2,654명, 9급 3만7,565명, 5급 2만5,574명 등이다. 특정직에서는 교육공무원이 28만8,259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경찰공무원 9만3,876명, 소방직공무원 2만3,587명, 법관 1,732명, 외무공무원 1,437명, 검사 1,150명 등이다. 기능직은 18만8,033명이다. 장·차관 등 정무직과 별정직 고용직 등 특수경력직은 2만4,072명이다. 장관급은 40명으로 장관 1명이 평균 2만3,347명의 공무원을 통솔하고 있다. 차관급은 69명으로 공무원 1만3,534명당 1명꼴이다.
◎최다 장관·최장수 장관/나웅배·박경원씨 5차례나/최형섭 科技는 7년半 재임
건국이후 50년동안 「장관복」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은 누구일까.
「최다장관」은 나웅배(羅雄培) 전 경제부총리와 박경원(朴璟遠) 전 내무장관이다. 두사람 모두 5번이나 장관에 올랐다.
나부총리는 82년과 85년에 재무장관과 상공장관에 올랐고, 88년에는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됐다. 경제통인 그는 또 문민정부 시절인 95년에는 통일원장관으로 기용됐다가 같은해 12월에는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기용돼 경제부총리를 2번 역임했다. 3대 경제부처로 꼽히는 기획 재무 상공의 수장을 모두 섭렵한 유일한 장관이다. 『기획원은 명예롭고(Honorable), 재무부는 막강하며(Powerful) 상공부는 다채롭다(Colorful)』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박장관은 내무 체신 교통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막강부처」였던 「내무수장」에 무려 3번이나 기용됐다. 62년에 내무장관에 취임한 그는 66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뒤 71년 6월까지 체신과 교통, 내무 등 3개 장관을 연거푸 지냈다. 74년에는 내무장관으로 다시 재기용되기도 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향한 그의 충성심은 「하늘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호(李澔) 장관이 4차례 역임했다. 55년과 66년에 법무장관으로, 60년과 67년에 내무장관으로 각각 기용됐다. 신현확(申鉉碻) 국무총리는 부흥, 보건사회, 경제부총리 등 장관을 3차례 역임한뒤 국무총리로 기용됐다. 또 신병현(申秉鉉) 장관은 경제부총리를 두차례 했고 상공장관도 역임했다. 최각규(崔珏圭) 장관은 경제부총리 상공 농수산을, 장예준(張禮準) 장관은 건설 상공 동자를 지휘했다.
최장수 장관은 최형섭(崔亨燮) 장관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소장이던 그는 71년6월 제2대 과기처장관으로 취임해 78년12월까지 7년6개월간 재임했다. 5년간 재임한 오인환(吳隣煥) 공보처장관은 93년부터 98년까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남덕우(南悳祐) 경제부총리는 기획원과 재무장관을 각각 4년3개월과 4년11개월씩 맡으며 9년2개월간 한국경제를 이끌었다.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김정렴(金正濂) 전 청와대비서실장은 9년2개월간 박전대통령을 보좌하기도 했다. 최다장관과 최장장관의 공통점은 박대통령 집권시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경제엘리트」들이 많다는 점이다.
한편 장관을 가장 많이 「생산한」 부처는 내무부다. 48년 건국과 함께 출범한 내무부는 올3월 행정자치부로 총무처와 통합되기까지 50년동안 62대 장관을 배출했다. 사건사고에 따른 책임추궁이 많아 10개월에 한번꼴로 교체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42대의 법무, 37대의 재무와 상공, 34대의 국방 등의 순이다. 반면 6공화국과 문민정부 들어 단명부처가 양산돼 93년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통합해 출범한 상공자원은 김철수(金喆壽) 초대장관을 끝으로 통상산업부로 개편됐다.<김경철 기자>김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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