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주역서 換亂 주범까지/朴 정권초기 경제전권부여 첫 등장/장기영 40개월 재임 도약토대 마련/남덕우 51개월 최장수 가장 성공評/5공이후 안정주력 성과는 미흡/문민땐 잦은 실책 경제난 자초고속성장을 거쳐 1인당 국민총생산(GNP) 1만달러 시대에 진입했으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놓이게 된 과정에서 경제관료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특히 온나라가 경제성장에 힘을 모았던 60년대와 70년대, 이들의 파워는 막강했고 성향과 정책방향에 따라 경제의 흐름이 바뀌곤 했다. 그들중에서도 각종 경제정책을 선도해 온 경제부총리는 「경제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란을 막지못한 죄과로 구속수감중인 강경식(姜慶植) 전 경제부총리는 재직시절 적은 일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경제전반에 대한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해시켜려고 해도 한계를 느낀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경제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었지만, 그의 고백처럼 비전문가였다. 정치 외교 안보 등에 비해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역대 경제부총리들은 대통령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과 권한을 인정받으면서 금융 세제 등 갖가지 정책수단을 동원해 경기를 부양시키거나 특정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워왔다.
청와대경제팀과 재무부 등 다른 경제부처의 수장들과 갈등을 빚고 때로는 파워게임에서 밀리기도 했지만, 경제부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관계와 재계는 물론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그의 말 한마디에 경제전반이 출렁이곤 했다. 때문에 그들에겐 경제에 관한 한 무한책임이 뒤따랐다.
경제부총리라는 직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34여년전인 63년 12월. 45년 광복직후의 내각 기획처장, 부흥부장관, 건설부장관, 경제기획원장 등으로 이어진 경제사령탑들이 빈곤과 폐허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힘을 썼지만 그들에게는 경제부총리라는 직함은 주어지지 않았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경제성장이라는 지상과제를 이루기 위해 그에게는 이를 주도할 별동대가 필요했고, 이는 경제부총리가 관장하는 경제기획원으로 현실화했다. 당시의 경제기획원은 경제정책과 예산, 건설부의 주요 기능 등을 한데 모은 부처로 경제에 관한한 사실상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경제는 고속성장의 급류에 올라탔다.
이후 마지막 경제부총리직을 수행한 임창렬(林昌烈) 부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24명이 경제총수역을 맡았다. 신병현(申秉鉉) 나웅배(羅雄培)씨는 2차례나 경제부총리에 임명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출신지역별로는 대구·경북이 6명으로 가장 많고 강원과 서울이 각각 4명과 3명의 경제부총리를 배출했지만 호남은 1명에 불과했다. 출신대학은 서울대가 12명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연·고대 4명, 외국대학 5명 등이다. 권력과 특정출신지역·특정대학과의 상관관계는 경제부총리직에서도 두드러진다.
박정권 시절의 경제부총리는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힘겨운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수명이 꽤 길었다. 박정권에서 경제부총리직을 수행한 인사는 불과 7명.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성공적인 경제총수로 꼽히는 남덕우(南悳祐)씨는 4년3개월동안이나 경제정책을 총괄했고, 장기영(張基榮)씨도 64년 5월 경제사령탑을 맡아 3년4개월여동안 경제개발의 토대를 쌓았다.
박정권은 경제성장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당시의 경제부총리들이 모두 성장지상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경기가 과열양상을 보이거나 인플레가능성이 커지면 안정론자가 등장해 서늘한 바람을 불어넣었고, 특히 박정권의 마지막 경제부총리인 신현확(申鉉碻)씨는 경제안정화를 통해 고속성장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 노력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5공의 경제부총리는 박정권시절에 비해 약체였다. 서슬퍼런 분위기에서 경제부총리가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전두환대통령이 김재익(金在益) 경제수석의 영향을 받아 경제안정을 주창하고 나섰기 때문에 박정희식 개발주도형은 효용가치가 적었다.
5공말기 국내경제는 3저호황으로 들떴다. 그러나 6공 들어 연이어 경제사령탑에 오른 3명의 교수출신 부총리(나웅배 조순 이승윤)들은 호기를 살려 경제수준을 높이고 경기를 연착륙시키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투기와 인플레가 뒤따르고 과소비가 고개를 들어 이때부터 환란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무성하다.
문민정부의 경제부총리들은 실패작이었고, 그들 자신도 불행했다. 문민정부 초기 경기가 과열양상을 보이는데도 부양책을 쓰는가 하면, 무역적자가 쌓이고 곳간은 바닥나는데도 『기초체질이 튼튼하다』며 메아리없는 독백을 거듭하다 결국은 국민 모두에게 멍에를 안겼다. 올 2월 출범한 새정부 들어 경제부총리직은 폐지됐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업적과 과오는 경제전반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김동영 기자>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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