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늘 흘러 넘친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한강 범람은 백제 기루왕 40년(116년) 6월의 일이다. 「한강물이 넘쳐 집이 떠내려가고 인명피해가 났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적혀있다. 신라 진평왕 11년(589년)에는 「나라 서쪽에 큰 물이 나 떠내려가고 파묻힌 인가가 3만 369호, 죽은 사람이 200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서쪽이면 한강 하류지역이 포함될 것이다. 고려때인 1375년에는 「삼각산 국망봉이 큰비로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서울이 수도가 된 조선시대에는 홍수가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도성안에 물이 넘쳐 종루 동편에서 흥인문까지 사람이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가지가 내를 이루어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인경궁 앞 다리가 무너져 14명이 급사했다」 「물에 떠내려갔거나 파묻힌 인가가 75채나 돼 곡성이 서로 들릴 정도였다. 지붕이나 나무위에 올라가 화를 면한 사람도 있지만, 익사자가 대단히 많았다」는 식이다.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8년 이후 최대의 수재는 1920년 7, 8월 홍수다. 서울에 하루동안 퍼부은 451㎜의 비로 용산 마포 뚝섬 영등포 수색일대와 안양천 유역 저지대가 물에 잠겼고, 파고다공원 팔각정 안에까지 물이 들었다. 5년후인 1925년 을축년 수재때는 침수된 저지대가 흙탕물 바다나 다름 없었다. 원효로 4가 전차종점의 수심이 7.26m, 마포종점은 6.6m나 됐다. 경기 강원지방의 피해도 극심했다.
광복이후에는 72년 8·19 수재가 가장 심했다. 사망·실종 481명, 침수가옥 3만7,000여동, 이재민 23만여명으로 을축년 수해를 능가했다. 84, 90년 수재와 함께 이번 수재도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한강 본류는 지켰으나 지류가 넘쳐 피해가 컸다. 백제 초기부터 수재를 겪고나면 제방을 쌓고 물길을 정비했으나 자연의 힘은 언제나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었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치수의 근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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