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물꼬튼 남북대화 93년 중단/7·4공동성명 채택 ‘적대적 공존’/고위급등 서울·평양 숱하게 왕래/‘화해·불가침 합의’ 불구/YS정권때 北核으로 모든 채널 끊겨1948년 8월15일과 9월9일. 남북한은 미·소 양대국간 타협의 산물인 한반도의 동강난 38도 허리를 경계로, 그날부터 분단 냉전국의 명패를 달기 시작했다. 6·25전쟁의 깊은 상처는 한반도「투 코리아」에게 오랫동안 대화의 기회를 봉쇄했다.
1971년 8월20일, 남북은「가족찾기회담」을 위한 판문점 적십자연락관 접촉차 분단 26년만에 처음으로 상면했다. 정홍진(鄭洪鎭) 회담운영부장(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은 남북 대화채널 구축을 위해 평양에 간 최초의 남측 관리였다.
북한대표와 11차례의 비밀접촉을 가진 정부장은 72년 3월28일 판문점에서 한적회담을 끝낸 뒤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가 북측의 헬기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그해 4월 서울의 중앙정보부와 평양의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실을 연결하는 직통전화가 비밀리에 가설됐다.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朴成哲) 북한 제2부수상은 극비리에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7·4남북공동성명의 기초를 다졌다.
김일성은 이후락을 만난 자리에서 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사건(1·21 사태)에 대해 『박대통령께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다』며 사과했다. 이부장은 『박대통령은 외세의 간섭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에 김일성은 크게 공감을 표시했다. 박성철은 박대통령과 마주앉아 김일성의 안부를 전할 때도 꼿꼿한 자세로 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다. 그날밤 가수 패티김은 신라호텔앞 영빈관 무대에 섰지만 자신이 누구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주 평화 민족의 구호를 드높혔던 「7·4 남북공동성명」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성명발표 날짜도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을 택했다. 7·4공동성명에 의한 남북간 화해무드는 박정희와 김일성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바탕에 둔 새헌법을 각각 통과시켰다. 7·4공동성명은 그러나 남북의 독재자에게 장기집권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을뿐, 진정한 남북관계 개선의 토대는 되지 못했다. 남과 북의 독재자들은 70년대의 남북대화를 통해 「적대적 공존」을 실험했을 뿐이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남북대화야말로 고위급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진전이 없다고 믿었다. 85년,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과 허담(許錟) 노동당 정치위원이 비밀리에 평양과 서울을 오갔다. 박철언(朴哲彦) 안기부장 보좌관과 한시해(韓時海) 노동당 중앙위원이 실무 책임자였다. 이들 두사람은 85년 5월부터 91년 11월까지 서울 평양 판문점 백두산 제주도 싱가폴을 오가며 42차례나 만났다. 85년 9월4일부터 3일간 허담과 한시해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경기도 기흥에 있는 최원석(崔元碩) 동아그룹회장의 개인별장에 안내됐다. 실내외 풀장이 있고 풀 사이드에 홈바가 설치돼 있는, 그야말로 초호화급 유흥장소였다. 그러나 대화는 별무소득이었다. 그해 10월 장세동부장과 박철언보좌관 등 5명도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만났다. 남북 정상회담문제가 논의됐지만 북한은 남북 상호불가침협정과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를 요구했고, 남측은 이를 모두 거절, 회담은 결렬됐다. 노태우(盧泰愚)정부의 대북접근 방식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남북간에 누적된 이질화현상의 극복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강영훈(姜英勳) 총리와 연형묵(延亨默) 북한 정무원 총리가 평양과 서울을 오갔고, 89년 2월부터 90년 7월까지 8차례의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남북간의 역사적 합의는 북한의 핵개발 위협으로 더이상의 실천적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북한은 93년 1월29일 남북당국 사이의 대화를 재개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했다. 김영삼(金泳三)정부는 남북대화의 공식·비공식 채널을 모두 상실했다. 미국과 북한이 대화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남한측엔 발언권이 없었다. 김대중(金大中)정부는 통일방안을 발표하기 보다 현실적인 화해·협력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정경분리원칙을 바탕에 둔 햇볕정책은 곧잘 보수층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실효적 결실이 기대되고 있다.<정진석 기자>정진석>
◎외교관계 수립/128개국은 남북한 동시수교/세계 191개국중 한국 183·북한 132국과 수교
48년 8월15일 정부수립이후 우리나라는 외교활동의 목표를 수교국 확대에 맞췄다.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북한보다 더많은 나라와 수교를 해야하는 일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나 다름없었다.
정부출범 이틀전인 48년 8월13일 미국과 자유중국(현재의 대만)이 대한민국을 정식승인해 수교관계를 맺었으며 이어 영국, 프랑스, 필리핀, 스페인, 독일 등과 차례로 수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에 힘입어 89년에 동구권국가중 헝가리와 수교한 이래 90년 러시아, 92년 중국과도 수교하는 등 현재까지 183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있다.
현재 전세계 국가수는 유엔회원국 185개국 포함, 191개국. 우리나라는 유엔회원국중 아프가니스탄, 쿠바, 마케도니아, 시리아, 모나코, 산마리노 및 북한과 수교관계가 없으며 비유엔회원국가운데 나우루, 통가, 교황청, 스위스, 투발루, 키리바시 등 6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다.
이에비해 북한은 132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남북한은 128개국과 동시수교를 한 상태다.
또 현재 우리정부는 101개국에 상주대사관, 38개지역에 영사관, 6개지역에 대표부를 두고 있으며 북한은 42개국에 상주대사관, 2개지역에 영사관, 14개지역에 대표부를 파견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정부구조조정계획에 따라 올해안까지 20개지역의 대사관, 영사관 및 대표부를 통폐합할 계획이다. 우리나라에는 미국등 90개국이 상주대사관을 두고있으며 6개국제기구와 대표공관이 설치돼있다.<윤승용 기자>윤승용>
◎역대 대통령 외국 방문/총 50차례 해외 頂上외교/朴 8·全 7·盧 12·金泳三 15회
역대 우리대통령들은 외국수반의 방한에 의한 정상회담보다는 상대국을 방문하는 형식의 정상외교를 주로 수행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주요국가들에 비해 외교적으로 약소국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방문은 건국후 지금까지 공식·비공식을 모두 합해 50차례. 첫 해외나들이는 48년 10월19일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이 맥아더 주일연합군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이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상외교는 아니다. 이대통령은 이때 역시 맥아더의 주선으로 요시다 당시 일본수상과 비공식회담을 가졌다. 비공식이었지만 건국후 첫 정상외교가 한일간에 이루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공식적인 첫 정상회담은 49년 8월 당시 자유중국 장개석총통의 방한으로 성사됐다. 대통령의 첫 공식국빈행차도 53년 11월의 자유중국방문으로 이루어졌다. 장개석 총통이 상호주의원칙에 따라 이대통령을 초청했던 것이다. 이대통령은 재임기간중 2차례의 한·미정상회담과 1차례의 한·월남정상회담을 가졌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서독, 미국, 동남아, 호주 등과 방문정상외교를 펼쳤다. 박대통령은 그러나 69년 8월 닉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후 79년 10·26사태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일체 외국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한 외교당국자는 『박대통령이 부재중 쿠데타발생우려 등 국내정정에 불안을 느껴 청와대를 떠나지 않으려 했던 것같다』고 해석했다. 박대통령은 재임 18년동안 겨우 8차례만 외국을 방문, 2년에 1번꼴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7차례 해외방문을 했는데 83년 10월 동남아 순방중에는 아웅산테러사건으로 각료들이 다수 순직하고 중도에 급거 귀국하는 불행한 사태를 겪기도 했다. 전대통령은 박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활발한 순방외교를 펼쳤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12차례 순방외교를 펼쳤는데 88년 10월 우리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 본회의에 참석, 연설을 했다. 노대통령은 「북방외교」의 깃발을 들고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소련과 중국을 처음 방문하는 등 활발한 대공산권 정상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해외순방이 너무 잦아 「껍데기 순방외교」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도 재임중 연평균 3회, 모두 15차례나 외국행차에 나서 의욕적인 정상외교를 수행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경우도 너무 외국방문이 잦은데다 수행인원이 과거에 비해 대폭 늘어 1회에 37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쓰는 바람에 야당과 외교가에서 「호화나들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취임이래 올초 런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고 6월에 미국을 방문하는등 이미 2차례 정상방문외교를 폈고 곧 이어 10월에는 방일, 11월에는 방중외교를 펼 예정이다. 김대통령은 전임 김영삼 대통령의 해외방문때 지적됐던 「예산낭비」비난을 의식, 수행인원을 대폭 줄이는 등 돈덜쓰는 해외나들이를 지향하고 있다.<윤승용 기자>윤승용>
▲제1·2공화국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체 불인정
·실지회복의 대상
▲제3공화국
유엔 감시하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 총선거
·평화통일구상 선언
·실체 불인정
·선 건실후 통일
▲제4공화국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 총선거
·6·23 선언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실체 인정
·평화공존의 대상
▲제5공화국
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 실시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실체 인정
·평화 공존
▲제6공화국
남북연합의 과도단계를 거쳐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 실시
·7·7 특별선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상호체제 인정
·선의의 동반자
▲김영삼 정부
화해·협력단계와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국가 완성
·민족공동체통일방안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의 통일국가
·통일헌법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김대중 정부
정경분리원칙에 의한 대북 포용정책(햇볕정책) 추진
·대북정책 3대원칙 천명(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적극 추진)
·통일방안보다는 실용·현실적인 남북교류 협력방안 마련에 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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