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요,청와대서 한보 부도낸다구요”/은행장들 ‘은행관리’ 지침받고 대책논의중 날벼락/갑작스런 부도발표이유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홍인길씨 “나는 깃털”서 현철씨·문민실세 ‘몸통’의혹만『이유야 어떻든 모든 것이 대통령인 저의 부덕의 결과입니다. 대통령으로서 이번 사건(한보사태)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죄말씀을 드립니다』
한국경제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한보사태가 홍인길(洪仁吉) 의원의 「몸통깃털」발언을 계기로 정치문제화한 97년 2월25일. 정확히 1년뒤 「나라를 망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청와대에서 물러나야 할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대(對)국민 사과방송을 위해 TV앞에 서야 했다. 이날 담화는 겉으로는 취임 4주년에 즈음한 정례담화였지만 한보사태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도의적 책임, 둘째아들 현철(賢哲)씨에 대한 YS의 첫번째 공식언급이 있게 된다는 점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YS의 대국민 사과문. 『진실여부에 앞서 자식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크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불찰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배석했던 청와대 관계자들 모두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대통령은 이날 「매우 착잡한 모습」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30분간 새벽조깅을 했지만 전례없이 이른 시간에 집무실로 등청, 의전실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이렇게 일찍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놀라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푸석해진 눈자위 등으로 짐작컨대 대통령께서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YS는 이 순간까지도 현철씨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실제로 YS의 담화는 해석여부에 따라 『진실여부에 앞서 괴소문이 퍼진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현철이는 억울하다. 왜 우리 아들을 괴롭히는가』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YS의 근거없는 확신은 불과 한달만에 아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산산조각 나야 했고 기세좋던 문민정부는 이후 치욕의 1년을 보내야 했는데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이 한보사태였던 것이다.
시간을 1개월 앞으로 되돌려 한보가 부도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자. 『뭐요, 청와대에서 한보철강을 부도내기로 했다구요』 97년 1월23일 오후 5시30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11층 은행장실. 한보철강 처리문제를 논의하던 제일은행 신광식(申光湜) 행장 등 4명의 은행장들이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왔다. 특히 신행장은 뜻하지 않은 소식에 크게 놀란듯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머지 은행장들의 태도. 『부도를 내도 은행이 내는 것인데 왜 청와대가 나서느냐』며 화를 내야 할 상황이건만 산전수전 다 겪은 은행장들은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모른채 허둥댔다. 은행장들은 당혹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부도는 아니다」라는 지침을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보관련 실무를 맡았던 한 은행 관계자의 말. 『정태수(鄭泰守)일가의 경영권을 박탈한뒤 「은행관리」를 한다는 것이 채권은행의 일관된 계획이었습니다. 부도처리 전날인 1월22일 밤, 제일은행 박석태(朴錫台) 상무의 지휘아래 제일은행 지하작업실에서 마련한 최종안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원칙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실제로 부도사실이 알려진 바로 그 순간 신행장과 우찬목(禹贊穆·조흥), 장명선(張明善·외환) 행장, 김시형(金時衡·산업) 총재 등은 이날 새벽 신행장이 시내모처에서 받아온 지침을 앞에 두고 「은행관리」이후 한보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도라니…』 은행장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어쨌든 은행장들은 부도방침이 알려진뒤 두시간만에 『한보를 부도내기로 했다』고 지각발표를 하는 악역을 맡게 됐는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신행장과 우행장은 구속, 장행장과 김총재는 한보사태의 책임을 지고 중도퇴진하는 불명예를 뒤집어 썼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즉 YS를 보좌하는 문민정부 핵심실세들은 한보사태에 어느 정도 개입했던 걸까. 그리고 왜 급작스럽게 부도를 내야 할 정도로 사정이 급박해졌을까. 이같은 의혹은 검찰수사와 국회청문회를 통해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문민정부 실세중 한보사태에 유일하게 노출된 홍인길의원의 역할을 통해 대충의 추론이 가능하다.
다음은 홍씨의 검찰진술. 『90년께 정태수씨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김명윤(金命潤) 변호사를 통해 정씨를 소개받아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에 들어온 뒤에는(총무수석으로 임명된 것을 가리키는 것)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정회장의) 아들인 보근씨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횟수와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95년 12월21일 총무수석을 그만둘 때까지 최소 3∼4차례 정도 청와대에서 보근씨를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홍의원은 또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라는 주장과 달리, 한보 부실대출에 비교적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어지는 홍씨의 진술. 『보근씨가 청와대에 들어올 때마다 「서로 알고나 지내라」며 청와대 비서관들을 소개시켜 줬습니다. 또 한이헌(韓利憲) 경제수석에게 「한보의 자금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도와 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는 취지의 전화를 했고 부도나기 2개월전에는 이석채(李錫采) 수석에게도 대출을 부탁했습니다』
결국 부도직후 이석채 경제수석이 『한보는 부도를 낸 것이 아니라 부도가 난 것』이라며 청와대와의 무관함을 누차 강조한 것은 여론무마용이었을뿐 홍씨를 비롯한 문민정부 핵심세력중 상당수는 한보대출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됐다.
그렇다면 「한보사태 몸통은 따로 있다」라는 소문은 단순한 상상이었을까. 한보사태로 불명예퇴직한 은행장들이 아무리 무능했더라도 이들이 부도직전 보여준 행동은 홍의원을 뛰어넘는 성층권, 소위 몸통이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지난해말 서울은행을 퇴직한 P씨의 증언. 『97년 10월말께로 기억됩니다. 뇌물수수혐의로 한창 구설수에 오르던 당시 손홍균(孫洪鈞) 행장이 검찰소환 직전, 실무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보철강에 200억원을 지급보증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중에 「손행장이 구속을 면하려고 정·관계 인사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다소 의문이 풀렸지만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담보였습니다. 100억원 지급보증에 대한 담보가 놀랍게도 철근 3만톤이었습니다.(결국 부장들의 반대로 100억원만 지원됐다) 부지나 건물을 담보로 잡는 경우야 허다한 일이지만 철근담보는 상식밖의 일이었습니다』
한보그룹 장지동 관리소창고에서 현철씨의 저서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도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당시 현철씨는 한약업자의 선거자금제공시비로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라도 하듯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펴낸 상태였다. 그런데 그 책 1만240권이 한보그룹 창고에서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채 발견됐다. 책의 정가가 6,500원인 것을 감안하면 8,060만원이 넘는 물량이었다.
결국 무능하지만 눈치빠른 은행장, 부패한 정치인, 저질 기업인들의 합작품이 한보사태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궁지에 몰린 YS가 특유의 깜짝 개각을 단행, 「강경식(姜慶植·경제부총리)김인호(金仁浩·청와대경제수석) 라인」을 출범시키게 되는데, 연유야 어찌되었든 한국경제를 국가부도로 몰고 간 경제팀을 한보가 탄생시킨 것이다.<조철환 기자>조철환>
◎제일은행과 한보/제일銀 특혜대출 대가로 부실자산 끼워팔기 가능성/서로 유착관계 유지한듯
흔히 한보사태의 최대피해자로 제일은행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제일은행은 95년까지만해도 리딩뱅크를 자임하던 「잘 나가던」은행이었지만 유원, 우성건설이 부도나면서 휘청거린뒤 1조1,000억원이 넘는 「한보 직격탄」을 맞고 부실은행으로 전락하게 됐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하면 제일은행은 한보사태의 피해자라기보다는 「공범자」 혹은 「수혜자」쪽에 가깝다. 제일은행이 한보와 유착관계를 유지해 온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당초 대성그룹에 인수키로 됐던 유원건설이 예상을 깨고 한보로 인수된 것도 그렇고, 신한종합금융 주식을 한보측 위장대리인들이 인수하려 했던 것은 제일은행과 한보의 끈끈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보가 제일은행을 이용했다기보다는 제일은행이 한보에 특혜대출을 해주면서 온갖 부실자산을 끼워 팔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제일은행은 96년 11월22일 보유중이던 신한종금 주식 15.2%를 두명의 정체불명자들에게 시가보다 2만원이나 비싼 가격으로 매각키로 계약을 체결, 화제가 됐다. 당시 이들중 한명이 신용불량자(적색거래처)이며 거주지가 한보그룹이 소유한 부동산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자금난에 빠진 한보가 신한종금을 움켜쥐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결국 신한종금주식 매입자들은 한보가 부도파문에 휩싸이자 아무런 설명도 없이 36억원이나 되는 거액의 계약금을 날린채 인수를 포기했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제일은행이 36억원을 고스란히 챙긴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 신한종금 주식을 인수하려 했던 사람들은 한보의 사주를 받은 사채업자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는데 한보로부터 4억원의 뇌물을 챙긴 신광식(申光湜) 제일행장의 『주식매입자들의 신원을 알지 못한다. 정총회장도 신한종금 주식 매입자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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