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관계가 수교이후 최악의 상태를 맞고 있다. 외교관 맞추방으로 빚어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26일 마닐라에서 열렸던 양국 외무장관 회담이 결렬됐다.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 열강가운데 우리에겐 사활적 이해가 걸린 나라중 하나다. 어쩌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정부는 더 늦기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양국관계 복원을 위해 외교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건의 단초인 조성우(趙成禹) 참사관 사건에 대한 자성의 토대위에서 양국관계를 다시한번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에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일련의 외교적 마찰이 김대중정부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김대통령은 외교에 관한 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이해가 넓고 지식과 경륜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우리 외교가 어떠했길래 김대중 정부에서 이런일이 일어났느냐는 실망의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러관계가 이렇게 된 배경은 몇갈래로 짚어볼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러시아를 너무 몰랐던 탓이다. 정부는 조참사관사건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내부, 즉 연방보안국(FSB)과 외무부의 갈등차원에서 이를 파악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 러시아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외통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리마코프 장관은 이미 FSB수장(首長)을 거친 러시아의 실력자라는 점에서 그들 내부의 헤게모니다툼일 것이란 가정은 애초부터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외교당국은 이런 잘못된 상황인식으로 러시아를 자극하는 결과만 낳았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외교당국의 안이한 자세다. 외통부는 마닐라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마닐라에서 만난 프리마코프는 박정수 외통부장관이 악수하려고 내민 손마저 외면하려 했다고 한다. 박장관이 그렇게 낙관했던 양국정상회담은 의제조차 끄집어내지 못했다. 우여곡절끝에 오늘 다시 회담을 갖기로 했다고 한다.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갈등이 해소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일련의 혼란상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같다.
우리는 이 모든 사태가 외교를 너무 쉽게 생각한데서 일어난 오류라고 본다. 정부는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지 러시아측의 의도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초동단계에서부터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더 큰 화(禍)를 자초한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러시아측의 숨은 의도를 잘 헤아려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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