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말하면 좋겠노” 機內서 ‘세계화’ 급조/시드니선언 電文받은 기획원 관리들 “이건 또 뭐야”/‘국제화’와 차별성찾기 골몰불구 결국 베끼기/영문표기 ‘SE GYE HWA’로… 외국인들 이해못해아·태경제협력체(APEC)의 제2차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94년 11월16일 대통령 특별기 안. 취임후 세번째 정상외교활동에 나선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이어 호주를 방문하기위해 시드니로 향하고 있었다.
김대통령이 한이헌(韓利憲) 경제수석 정종욱(鄭鍾旭) 외교안보수석 주돈식(朱燉植) 공보수석 등을 불러 모았다.
『내일 아침 기자들과 간담회가 있제. 뭘 말하면 좋겠노』(김대통령)
『그냥 편안하게 하시지요. 쉬어가는 일정인 만큼 순방성과를 설명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도……』 기사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듯 김대통령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느낀 것인데 우물안 개구리가 돼서는 안되겠데이. 나와 보니 바깥에 기회가 많은 것 같다. ……의견을 모아 보제』(김대통령)
수석들이 따로 회의를 하는 동안 김대통령은 APEC 회담을 떠 올렸다. 『2002년까지 아·태지역내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이룩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앞서 우루과이협상 비준절차를 마친다…』
김대통령이 한수석을 찾았다.
『지난번 자카르타에서 「세계…」, 아 세계시장이라 했나.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없을까』
『국제화, 세계화 말입니까』(한수석)
『세계화가 좋겠다. 내일 아침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보세요』(김대통령)
호주도착 즉시 비상이 걸린 곳은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경제기획원이었다. 싸인펜으로 쓴 듯한, 세쪽 짜리 전문(電文)을 받아 든 기획원 간부들은 『이건 또 뭐야』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전문의 골자는 「세계화 의미, 세계화 추진 배경 및 과제, 추진방향 등을 즉시 성안해 줄 것」이었다. 이전까지 「국제화」에 매달리고 있던 경제팀은 이를 토대로 골격을 만들어갔다. 당시 기획원 간부 P씨의 회고. 『그날밤 보고서를 만들어 팩시밀리로 보낸 후 한수석이 고친 것을 되받아 보충, 재송고하는 일이 이튿날 새벽 5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주고 받은 문서분량만 수백페이지에 달할 겁니다. 물론 (김대통령) 출국전까지 세계화에 대한 검토작업은 전혀 없었습니다』
김대통령은 17일 아침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여 세계화를 위하고 차세대를 위한 장기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곧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세계화 장기구상」, 이른바 시드니 선언이었다. 발표당시 3대 과제 및 5대 추진방향이 제시되는 등 모양새를 갖췄지만 급조됐음이 이내 확인됐다.
경제부처는 갑작스런 「세계화」 등장배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존 「국제화」와의 차별성 찾기에 골몰했다.
『세계화는 국경개념 없이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고 국제화는 국경개념은 있으나 국경을 초월해 공통적인 가치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가 국제화보다 적극적이고 상위적인 개념이다』 한수석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내놓는 아이디어는 「국제화」베끼기에 급급했다. 홍재형(洪在馨) 부총리마저 5일뒤 임시국무회의 직후 『세계화는 기존 국제화정책의 연장선 위에서 추진될 것이기 때문에 정책기조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실토했다.
야당에선 쌀개방 파문에 이은 성수대교 참사와 세도(稅盜)비리 등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YS 특유의 「국면돌파」 수단이라고 폄하했다.
김대통령은 세계화를 왜, 느닷없이 들고 나온 것일까. 전직 경제부처 인사 K씨의 분석. 『국제화나 세계화는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요란스럽게 떠들 구호도 아니었죠. 무모한 해외진출을 부추긴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선언 배경은 몰라도 그 이후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 정치적인 의도로 활용된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국제화는 개혁 이데올로기로는 부족하죠』
그로부터 10여일 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통합 등 경제부처 조직개편 방침이 발표됐고, 삼성그룹의 자동차산업 진출도 허용됐다. 12월23일엔 전면개각이 단행됐다. 명분은 세계화였다. 환란(換亂)의 씨앗을 키웠음은 물론이다.
그달 28일 청와대. 김대통령은 기자들과 송년모임을 겸해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내 생각이므로 전부 옳다는 것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운을 뗀 김대통령은 몇가지 뼈있는 발언을 했다. 『그간 「국제화」란 말을 많이 써 왔고 나도 그랬지만, 「세계화」는 그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다. …세계화하는데 남의 것을 모방이나 해서는 안된다. 한국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세계화는 21세기를 바라보며 하는 것이고, 차세대를 위해 하는 것이다』
「차세대」는 민자당으로 불똥이 튀었다. 김종필(金鍾泌) 대표의 퇴진선언과 당명개칭, 당직개편 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또 「한국적인」 세계화는 대외적으로 차별성(?)을 갖게 했다. 95년2월28일. 세계화홍보대책위원회. 이경재(李敬在) 공보처차관 주재로 관계부처 1급들이 모였다. 김대통령의 유럽순방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영문자료 만드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세계화 영문표기를 한글 발음 그대로「SE GYE HWA」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의 K비서관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외국사람이 웃을 겁니다』 『의미전달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GLOBALIZATION」(글로벌라이제이션)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대다수 참석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세계화를 단순히 「GLOBALIZATION」으로 표기하면 김대통령이 주창하는 세계화의 특성이 간과될 수 있습니다. 「GLOBALIZATION」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는 국제경제학적 개념으로 한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총체적인 국가전략으로 한국의 고유한 개념이지 않습니까』(K비서관) 난상토론. 그러나 청와대의 사전방침대로 「SE GYE HWA」가 결론이었다. 외신이나 외국인들은 「SE GYE HWA」를 「GLOBALIZATION」으로 이해하는데 한 참이 걸렸다.
세계화는 이듬해 하반기 「경쟁력 10%이상 높이기」가 제창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슬로건으로 그친 셈이다.
세계화의 이런 비운(?)은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정부와 여당내 손발이 맞지 않은 점도 원인이 됐다.
세계화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A씨의 회고. 『최소한 세추위내부에선 세계화는 개혁이었습니다. 「개혁」대통령이 세계화를 끄집어 낸 것도 그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제화에 대비하자는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정부에서조차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거죠』
실제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세계화를 전담하던 박세일(朴世逸) 정책기획수석은 사법· 교육 ·행정 개혁 등을 놓고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직후엔 『무모한 (개혁)작업으로 표를 잃게 됐다』는 비난과 함께 선거패배의 책임론에 시달렸다.
A씨의 계속된 설명. 『국제적인 기준에 맞춰 개혁하자는 세계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이 허용된 것이나 사외이사제도 주주대표소송제도 등의 도입도 그때 제시됐던 겁니다』<정희경 기자>정희경>
◎문민경제 슬로건들/‘新경제’ ‘삶의 질’에서 ‘경쟁력10%…’ 등 까지 전시성 구호들 量産
「변화와 개혁」을 국정지표로 삼았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역대 정부에 비해 많은 슬로건을 만들어 냈다. 또 6·25이후 최대 위기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로 가기까지 문민 경제팀이 남긴 것은 빛바랜 슬로건 뿐이었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新경제」. 이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준을 넘지 못했던 신경제는 전시성 행사로 점철하며 국제화로 대체됐다. 국제화 역시 1년도 못넘겨 세계화에 바통을 넘겨주었다. 국제화추진위원회가 세계화추진위원회로, 국제화기획단이 세계화기획단으로 각각 추진기구도 이름을 달리했지만 내용물은 그대로였다.
95년초엔 「삶의 질」 향상이 최고의 정책목표로 자리잡으면서 경제정책 당국자들의 화두가 됐다. 이듬해엔 이전 슬로건들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판단했는지 「경쟁력 10%이상 높이기」가 나왔다. 「신경제」를 「新경제」로 써야 했던 것처럼 관련자료에 「10%」가 아니라 반드시 「10%이상」으로 표현해야 했다. 당시 경제팀은 은행장을 불러 모아 자율결의형식으로 금리를 10%이상 낮추도록 하는 등 『경쟁력을 높이자』고 목청을 높였다.
환란(換亂)이 닥친 97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융·외환시장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부실기업들이 수술을 기다리며 응급실에 대기하는데도 「열린 시장경제로 가기 위한 21세기 국가과제」가 쏟아져 나왔다.
포장을 바꾸기 위해 무수한 공무원들이 동원됐다. 슬로건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융실명제 정부조직개편 등이 깜짝쇼 형식으로 발표됐다. 그 과정에 소요된 행정비용이란.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추진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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