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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리더십(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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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리더십(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

입력
1998.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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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랑스런 대통령’ 갖고싶다/‘일그러진 최고권력자’ 굴곡의 반세기 대변/힘·민주성·국제안목 갖춘 지도자 필요한때『국민이 퇴임을 아쉬워하는 대통령을 갖고 싶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국민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퇴임할 때, 한 교수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아듀 YS」라는 칼럼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장이다. 채워지지않는 갈망으로 가득찬 이 문장은 『영광의 시간은 짧고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YS 이임사의 한 대목과 서글픈 대조를 이뤘다.

물러나며 고개를 떨군 대통령은 YS만이 아니었다. 건국 50년 동안 국민은 시종 최고권력자들의 일그러진 퇴장을 보아야만 했다. 반세기를 반추하면, 언뜻 떠오르는 장면들은 모두 고통스럽고 굴곡돼있다. 『국민이 원한다면…』(이승만·李承晩 초대대통령, 4·19 혁명으로 퇴임하면서), 『나는 괜…찮…아…』(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궁정동 안가에서 총을 맞고),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앞에 섰다』(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백담사로 가면서)….

정치학자들은 이를 「실패한 리더십」으로 규정하며 그 원인을 지도자의 권위주의, 독단과 아집에서 찾았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보수주의자 드메스트르가 『국민은 자기들 수준만큼의 지도자를 갖는다』고 설파한대로, 실패한 리더십은 국민의 미성숙한 정치역량과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 유신체제선포,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7쿠데타, 노태우 전 대통령의 3당합당 등은 지도자의 권력욕과 독선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다. 당시 정치권과 국민의 역량이 권력자의 왜곡된 정치행위를 견제 또는 저지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도 빼놓을수 없는 요인이다.

서울대 안청시(安淸市), 연세대 송복(宋復)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국민의 「이중성」을 제시한다. 안교수 등은 『우리 국민은 민주적 지도자를 원하면서도 힘있는 지도자를 바란다. 이런 국민의 이중성이 리더십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사실 우리 국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의 혁명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문민개혁의 선구자」로 묘사하며 국가지도자의 영웅성을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의 영웅주의가 필연적으로 독재성으로 귀결될 때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저항하곤 했다. 지금도 국민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기적같은 경제회복을 이뤄주기를 기대하면서도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있다.

결국 리더십의 성공여부는 힘과 민주성의 조화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국민의 정치의식이 한단계 성숙돼야하며 이 역시 리더십의 몫이다.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장은 『국가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한다』며 『그것은 말만으로는 안되며 리더 자신과 주변에서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솔선해야한다』고 말했다.

전혀 차원을 달리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질서를 형성해 가고있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예견하고 적응해내는 예지력도 리더십의 중요한 부분이다. 서울대 김광웅(金光雄) 교수는 『우리가 국제경제·정치의 영향을 강력히 받고있는 지금, 국가지도자의 국제적 안목은 중요하다』며 『리더십의 국제화는 IMF극복 등 현안을 극복하고 내부갈등을 해소해 낼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영성 기자>

◎영욕의 청와대/일제 총독·美 군정사령관 4명 외국인 한때 주인노릇/“경무대란 이름 국민원성” 2공화국때 청와대 개칭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관저및 집무실이자 권부(權府)의 대명사였던 이곳에는 국민적 갈채와 원망, 저항이 교차했던 영욕의 현대사가 선명하게 기록돼있다.

당초 「경무대」로 불리다 2공화국 당시 청와대로 개명된 이 곳은 건국이후 지금까지 이승만(李承晩) 윤보선(尹潽善) 박정희(朴正熙) 최규하(崔圭夏)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등 모두 8명의 지도자를 주인으로 맞았다.

19세기말 조선 고종은 현재의 청와대 자리를 북원(北苑)이라 부르고 이곳에 과거장 기능을 하는 경무대(景武臺)등을 세웠다. 일제는 1939년 바로 이 자리에 총독관저를 지었는데, 이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간인 93년 10월 철거됐으며 노태우 대통령 집권초기까지 역대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로 쓰였다. 48년 건국 이전에는 미나미(南次郞) 고니소(小磯國昭) 아베(阿部信行)등 3명의 일본총독과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중장등 4명의 외국인 통치자가 경무대 주인 노릇을 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경무대로 거처를 옮기고 「경무대」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60년 2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씨는 「경무대란 이름에 국민의 원성이 담겨있다」는 여론에 따라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서울시사 편찬위원인 김영상(金永上)씨는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靑瓦臺」등 두가지 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미국의 「화이트 하우스」와 대비돼 「블루 하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청와대 개칭논란은 박대통령 집권때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 활동기간에도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현재의 대통령관저(90년) 본관(91년)은 모두 노대통령 집권기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김광덕 기자>

◎역대대통령 주량·흡연/이승만­“국민이 굶는데…” 금주/박정희­막걸리와 시버스 리걸/전두환­대령때 술·월남전때 흡연/김영삼­기분 좋으면 포도주 몇잔/김대중­금연·가끔 식사때 소주

역대 대통령의 주량과 흡연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대부분은 술과 담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각자의 기호에 따른 차이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막중한 자리를 이끌어가는 책임과 고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젊었을때 술과 담배를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끊었다. 해방후 귀국해 가끔 막걸리를 즐겼으나 한국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수 있겠느냐』며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술과 담배를 모두 즐겼다. 소박한 성격대로 막걸리를 특히 좋아했고, 측근들과의 술자리에서 막걸리에 맥주를 타는 「맥탁」과 사이다를 섞는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양주로는 시버스 리걸을 즐겼으며, 「10·26」 마지막 자리에도 어김없이 막걸리와 시버스 리걸이 함께 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실수를 용납지 않는 외교관 생활이 몸에 밴 까닭에 술을 마시지 못하고, 공식만찬등 부득이한 경우에는 마주앙을 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령때 술을 배웠으며, 담배는 71년 백마사단 29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을때 피우기 시작했다는게 주변의 설명이다. 그러나 체질에 맞지않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패스포트와 전통곡주인 삼해주(三亥酒)를 주문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술을 자주하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좋으면 놀랄정도의 주량을 과시했다고 한다. 여름과 가을에는 막걸리를, 칵테일로는 진토닉을 잘 마신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년시절 두주불사일정도로 상당한 주량을 과시했으나 71년 당내 대통령후보 경선이후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가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기분이 좋으면 포도주 몇잔을 마시는 정도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때 담배를 하루 한갑정도 피운적도 있으나 83년 미국에 체류하면서 건강등을 이유로 금연했다. 술은 식사때 소주 한두잔을 반주로 즐기지만 자주하는 편이 아니라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권혁범 기자>

◎대통령 어원/1884년 ‘승정원일기’에 고종이 美 대통령 지칭

「대통령」이란 용어는 조선 고종 당시 미국의 「프레지던트」(President)를 지칭하면서 처음 쓰였다는게 정설이다. 1883년 민영익(閔泳翊)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제출한 조선국왕 신임장에는 대통령을 「백니쇠텬덕」으로 표기했다. 이는 프레지던트를 뜻하는 「백리이천덕(伯理爾天德)」의 독음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1884년의 「승정원일기」등에는 고종이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이란 호칭을 붙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19세기 말 청나라에서는 미국 대통령 호칭으로 두목(頭目) 통령(統領) 총통(總統)등이 쓰였다. 「대통령」이란 어휘가 중국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 우리나라 또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19년에 중국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모두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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