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수있다” 애국적 유대감으로 IMF도 극복하리라 믿어/지정학적 위치탓 强國 상호균형속 ‘안정된 미래’ 예상도반세기 이상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해(理解)의 폭을 넓히고, 점점 좁아지는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전망해보기 위해서는 다른 문화에 푹 빠져볼 것을 권해 왔다. 나는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동아시아 국가에서의 경험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1년, 52주동안 매주 50년의 한국전 발발이후 한국에서 겪은 여러 경험담을 되짚어 왔다. 나는 매주 연재된 「한국의 추억」을 매우 사려깊고 정확한 솜씨로 다뤄준 한국일보 및 코리아 타임스의 편집진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껴 왔다. 이 회고록이 자신들에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국과 미국의 친구들이 편지와 여러 의견을 보내온 데 대해 나는 정말 기뻤다.
나의 연재물이 그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려주곤 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재직할 당시에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던 사건에 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고, 한미관계가 중요한 시대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 통찰력을 제공해 준데 대해 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다.
지난 1년동안 이 회고록을 읽어온 사람들은 내가 유교전통아래서 대인관계에서의 평등을 중시하게 됐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법적 서류나 계약서보다 더 중요하다. 「한국의 추억」 최종회를 쓰면서 나는 다음 몇가지는 지적할만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에 머물면서 나는 몇몇 유력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만남이 겉핥기 수준조차 되지 못했고, 그렇게 가까운 많은 친구들에게 소홀히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대사관의 훌륭한 운전자였던 김승연씨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아내와 나는 정말 그와 각별한 존경과 사랑의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나의 대사 임기동안 그는 피붙이처럼 가족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씨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엄성을 갖고 있었고, 항상 우리의 안전과 편안함을 살펴주었다. 비록 그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으나, 내 아내가 90년 2월 세상을 떠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로 하여금 그녀를 추모하는 선물을 많이 하도록 한 사람이 김씨였다는 것을 나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년전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슬펐다. 내가 교분을 쌓고, 또 나의 삶을 풍부하게 한 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한국사람은 각계각층에 너무나 많이 있었다.
둘째, 한국이란 환경으로의 출입이 잦은 국외인(局外人)으로서, 나는 한국문화의 힘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너무나 많은 외세와의 힘겨운 만남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한국민들은 너무나 큰 삶의 고통을 받았고, 때로는 국가적 자존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줄 아는 한국민의 능력을 알고 있고, 이를 높이 평가해 왔다. 나는 미국에서 98년의 외환위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확실히 그것은 한국의 민족적 특성이 극복해야 할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전세계 언론은 이 위기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위기는 분명히 심각한 것이지만 몇년 후에는 단지 불유쾌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수 십년동안 한국민들이 이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극복해 내는 것을 지켜봐 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감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교육수준과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산업시설 체계, 전 국토를 견고하게 엮은 에너지및 교통망이 있다. 무엇보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할 수 있다」(Can Do)는 정신이 한국민 마음속에 있다.
98년 외환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나에게도 「우리 증후군」이라는 것을 생겨나게 했다. 자신들만의 독특하고 오랜,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국민들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왔다. 『국가적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금붙이를 내놓는 것이 우리(our)의 의무입니다』 이것이 금융위기에 처한 한국인의 첫 대응이었다. 「우리 증후군」은 어려운 시기에 한국민들이 서로 마음을 모으는데 기여했다.
셋째, 한국은 힘과 중요성이 증대되는, 세계에서 중요한 전략적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은 강대국간의 「게임」에서 점점 더 중요한 「선수」로 간주되고 있다. 일본이나 러시아와 잠재적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은 근대화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에너지·천연 자원에 관한 합작사업에 일본이나 중국보다 한국을 끌어들였다. 일본은 강력한 한국을 대륙의 세력과의 관계에서 완충지대 또는 보호막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 지역내 다른 세 강국들이 안정요인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주변 4대 초강국들이 상호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한국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국의 미래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특히 중요하다. 한국은 과거 「Middle Kingdom」(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위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한국을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왔다. 베이징(北京)의 현 방침은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한국에게 유익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간여할 수 없을 것이고, 한국의 궁극적 미래는 베이징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룬 한국의 회귀(回歸)는 20세기 마지막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요한 움직임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정책을 펼 때, 서울이 스스로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워싱턴을 긴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국민들을 상호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지구촌의 일원으로 이끄는 것이며, 이는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우리의 입장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지만 한중관계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서울의 인식에 중요한 변화를 안겨주었으며, 그리고 그 것은 평양에 압력을 가하는 새로운 방법의 첫 단추를 제공했다.
거론하기에는 약간 부담스럽지만, 네번째도 이야기해야겠다. 「우리」증후군을 만들어낸 한국 역사는 한편으로는 우방국들에게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행동이나 사고(思考)방식으로 받아 들여졌다. 몇몇 미국인들은 이를 한국의 「제로섬」 접근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침략자나 압제자와의 관계는 한국 동맹국들을 중용(中庸)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기도 했다. 훌륭한 나의 한 한국인 친구는 『한국말에 타협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타협은 굴복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한국신문의 사설은 종종 한국민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논평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만약 국외자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그 때는 우리 증후군이 효과를 발휘하고, 이어 엄청난 분노가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는 가족외부의 비판가에 맞서 서로 돕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문화적으로 이런 반응이 더욱 격렬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Native Speaker」의 저자인 한국인 소설가 이창래(李昌來)씨는 98년초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그 해 위기의 첫 단계에서 표출됐던 애국심이 냉소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같은 애국적 유대감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사람들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다음 단계가 시작일 따름입니다… 희망이라면, 세계의 즉각적이고 충분한 지원이 이 나라를 다시 제대로 복원시킬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암울한 비관적 전망이 깔려 있습니다. 호화찬란한 배가 가라앉는다면, 그처럼 반짝거리던 한국에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같은 결속이 계속 공고히 유지될수 있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물론 나는 호화스러운 한국호(號)가 긍정적인 발전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미국에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98년 서울의 위기는 왜곡된 금융시스템을 제대로 바로잡고, 금융관례에 필요한 개방을 유도하며, 한국을 세계무역 시스템에서의 실질적 참여국으로 계속 남아있게 하는 데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남덕우(南悳祐)씨와 나는 견해를 같이 했다. 남씨는 국무총리를 지낸 훌륭한 경제학자이다.
이같은 틀안에서 우리 모두는 98년 6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관심있게 지켜 봤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영웅적으로 생각하고, 또 이 땅의 현 위기만큼 심각한 개인적 위기를 겪었던 지도자에게 이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과의 성숙한 상호관계를 설정할 기회였다. 김대통령은 금융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김대통령의 목표는 한반도를 두쪽으로 갈라놓은 냉전의 마지막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있는 새 정책을 펴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은 한국인과의 생활이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히려 그것은 놀랄만큼 보람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김대통령은 수년동안 어느 전임자들보다 더 활발하게 그리고 강도높게 세계를 누비며 경험을 쌓아 왔다. 비록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그의 초기 활동은 그가 진정 필요한 지적 통찰력을 갖고 있고, 위기에 대응하는 한국의 「Can Do」 정신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미국에서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수많은 토대도 구축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맞서 싸웠던 몇몇 전임자들이 효과적으로 추진했던 세계화 약속도 함께 이행해 나갔다.
나의 후임자중 한 사람인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자신의 재임기간중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식과 이해가 부적절하며 때로는 왜곡됐다는 것을 자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바꾸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인들이 많은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레그 대사는 미국에서 「한국학회」(Korea Society)를 세웠고, 나는 그 학회의 일원으로서 그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우리는 한국의 여러 문제점뿐 아니라 한국과 한국의 예술, 생산품에 있어서 미국의 이익이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관이 개관하면서 그것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다. 미 전역의 대학캠퍼스에서 한국어 및 지역 프로그램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과 한국문화에서의 중요한 학문적 이해관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국제학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최근 몇년동안 한국을 다루는 유력 지도자들과 작가, 사상가들을 모아 한국에 대한 연례 회의를 개최해 왔다. 만약 지구촌에서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공감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 마지막 연재물의 제목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삶의 풍요로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이 모임에 정력과 시간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와 내가 86년 10월말 한국을 떠났을 때, 남덕우 박사는 환송파티를 열어줬다. 아마도 그것은 오랫동안 계속된 환송행사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 파티에서 한국인들은 정말 마음씨 따뜻하고, 호의적이며, 때로는 감동적이었다. 남박사의 그 때 인사말을 아내와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의 하나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외교관으로서가 아닌 학자로서 워커 교수가 한미 양국의 이해를 높이는 데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한미 동반자관계의 강력하고 분명한 옹호자로서 워커 박사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또 다른 활동을 위한 무대로 옮겨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남총리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써왔다. 여권에 찍힌 한국 입·출국 도장, 한국학회와 함께 한 일, 매년 한미 정례회의에서 한미 안보연구에 관한 활동, 「한국의 추억」과 같은 기고및 연설 작업, 여타 다른 활동 등은 참으로 한국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 삶은 이같은 상호관계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의 추억」에서 나타내려고 했던 나의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한국, 그리고 재능있는 한국민에 대한 나의 깊은 애정 (2)한국땅과 그 문화에서 찾을수 있는 광범위한 기회의 다양성 (3)내가 느끼기에 매우 필요한, 양국사이의 동등한 동반자관계로 이끌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4)과거 40년간의 변화의 중요성과, 한국문화가 이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와 혁신적인 세계통합의 물결에서 얼마나 놀랄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독자들이 아내 세니와 내가 「Hankuk」(한국)에 대해 느꼈던 애정의 깊이를 이해했으리라 믿는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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