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쏟아지고 나면 도심은 흉한 속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뒷골목에 감춰져있던 쓰레기가 거리로 밀려나오고 하수구는 배수는 커녕 중금속이 뒤섞인 퇴적물을 도로 위로 토해낸다.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지하도에 물이 차는가 하면 날림으로 쌓은 축대들이 무너져내려 부실공사를 고발한다. 평소 번드르한 화장속에 감춰진 추한 도시의 속살이 여지없이 까발려지는 것이다.IMF사태와 개혁 바람은 지금 우리 사회의 병든 내면을 노출시키는 장맛비 역할을 하고 있다. 고도성장이라는 화장이 벗겨져나가자 빚더미의 기업경영, 비효율 덩어리인 공공분야, 나눠먹기식 연고주의, 부패구조의 만연, 실종된 도덕성등 온갖 병폐들이 보기흉한 그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5개 은행 퇴출을 시작으로 불이 붙은 금융개혁과정에서도 그랬다. 신용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하는 은행원들이 전산망을 마비시키거나 대출장부등 중요서류를 파기해 금융인의 직업윤리가 도마위에 올랐다. 특히 3일 영업정지된 장은증권은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해지자 417명 전직원에게 정상적인 퇴직금의 5.7배가 넘는 160억원을 명예퇴직금으로 일괄 지급한뒤 영업중단을 신청해 충격을 주고 있다. 만약의 경우 모자란 고객예탁금 반환등에 사용되어야 할 돈으로 자기들끼리 퇴직금 잔치를 벌인 것이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다.
새삼 놀라기는 했지만 우리사회의 직업윤리가 실종된 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며 비단 금융기관뿐이랴. 얼마전에는 국방의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 앞장서 지켜나가야할 군장성들이 줄줄이 병역청탁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한 장성은 일개 준위에게 직접 찾아가 자기 아들을 군대에 가지않도록 해달라고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PCS사업자 선정업무를 맡은 정보통신부 장차관·실장·심사위원장 교수등 최고정책결정권자들이 거의 한명도 빠짐없이 업체로 부터 뇌물을 받고 정보를 알려준 사건 역시 도덕성에 앞서 기본적 직업윤리마저 망각한 부끄러운 사례이다. 이 뿐인가. 촌지액수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는 일부 교사, 회사재산을 빼돌려 개인적인 부를 축적한 기업인, 청탁을 받고 부도직전의 회사에 우수한 경영평가를 내린 회계사등 자기 직업에 부과된 최소한의 규범마저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례들은 너무 흔하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파괴로 희생당하는 수달형제의 TV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가슴을 저몄던 시청자들은 제작진들이 연구용 수달을 가둬두고 촬영했다는 사실에 경악해야 했다. 나 자신도 언론인의 직업윤리를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공자(孔子)는 정치의 본질에 대해 묻는 제나라 경공(景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 군주는 군주의 본분을, 신하는 신하의 직분을, 어버이는 어버이로서 역할을,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맡겨진 직분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이말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자신의 직업윤리를 철저히 지켜야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IMF로 무너진 우리 사회를 다시 세우는 일은 건전한 직업윤리를 되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원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애국심 희생정신같은 추상적 윤리의식보다는 철저한 직업윤리가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다.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금융인은 금융인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기업인은 기업인대로 최소한 자신의 직업적 직분만이라도 충실하자. 공공(公公), 금금(金金), 군군(軍軍), 기기(企企)의 기본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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