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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문창재 논설위원(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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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문창재 논설위원(지평선)

입력
1998.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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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이 사형집행 몇시간을 앞두고 목숨을 건진 것은 22세때인 1897년이었다.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왜군장교를 척살한 혐의로 인천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고종황제로부터 중지 특명이 도달했다. 백범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안 고종은 개통된지 사흘 밖에 안된 경인간 전화로 급히 특명을 내린 것이다. 전화개통이 3일만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상놈이라고 천대받는 아버지를 양반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백범은 17세때 해주감영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썩어빠진 세상의 실상을 목도한다. 부자들이 몇천냥씩 주고 거유(巨儒)의 글을 사 진사도 하고 급제도 하던 시절이었다. 서울 아무 대신에게 서찰을 부쳤으니 나는 반드시 될 것이라느니,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비단 몇필을 바쳤으니 떼어논 당상이라느니 하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할머니에게 했던 아버지의 단지효도(斷旨孝道)를 본받겠다고 칼로 자신의 왼쪽 넓적다리 살을 베어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게 먹여드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분량이 적어 그런줄 알고 다시 칼을 들어 더 크게 베어놓고는 너무 고통이 심해 살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단지나 할고(割股)는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같은 불효자(如我不孝)가 어찌 효자가 되겠느냐고 탄식했다.

■백범 서거 49주기(26일)를 맞아 다시 읽어본 <백범일지> 에 나오는 내용이다. 잠시나마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얘기로 믿어지지 않는다. 백정과 범부처럼 살겠다고 호를 백범이라 했다지만 그는 너무 비범했던 인물이었다. 백범기념사업회가 이번에 공개한 백범의 국민장 부의록에는 2,000여명의 조객명단이 실려있다. 암살 배후로 지목되던 인사들로부터 명월관 청향각 「기생일동」도 있다. 큰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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