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남북간에 있었던 각종 대화 제의는 상대가 수용을 꺼리는 내용을 담거나 까다로운 조건때문에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쪽은 전자(前者)쪽이었고, 북한은 후자(後者)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의 제의는 대화가 목적이라기보다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강했다. 예컨대 북한이 사실상 있지도 않은 각종 단체를 내세워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갖자고 한 사례나 적십자회담을 하자면서 전제조건으로 미군철수를 내세우는 것등이 바로 그 전형이다.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던진 제의를 상대가 덥석 받아들임으로써 제의한 쪽이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84년 북한의 수재물자 지원이 바로 그런 예다. 그해 9월초 때아닌 폭우로 남한이 엄청난 수해를 입자 북한은 동포애를 내세우며 수재민에게 구호품 지원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우리측이 수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정부는 전격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남북간에는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국회회담등으로 한동안 대화분위기가 무르익었으나 북측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결국 대결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는 북한이 지난 15일 제의한 「판문점 통일대축전」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북한이 성사를 기대하고 던진 카드인지 여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공은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셈이다. 정부가 이번 제의를 망설임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경우와는 형식이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그들 제의에 「약방의 감초」처럼 늘 빠지지 않았던 국가보안법 폐지나 안기부해체등의 구호가 이번엔 빠져 있다. 정주영(鄭周永)씨와 소떼방북으로 조성된 화해무드 때문일까. 하지만 북한의 자세 변화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변화가 「햇볕론」에 화답한 것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확실한 증거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 정부가 「통일축전」 준비를 위해 당국자간 실무접촉을 역제의키로 한 것은 그래서 적절한 대응으로 보인다. 북한의 변화자세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시의적절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북한의 제의를 수용키로 한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까운 시도다. 우리사회 내부엔 친북동조세력인 한총련등이 철없이 날뛰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통일축전」을 수용키로 한 것은 자신감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햇볕정책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려면 우리내부가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한총련같은 천방지축의 친북단체가 맹목적으로 북한을 대변하려 한다면 통일축전도 결국 저들의 대남전술에 말려드는 결과가 된다. 남북문제만큼은 정부를 창구로 질서있게 추진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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