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기술자」란 악명을 가진 이근안(李根安) 전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감이 궐석재판을 통해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서울고법이 12일 고문 피해자 두 사람이 제기한 재정신청 사건 심리를 11년만에 시작한 것은 시대가 바뀐 것을 실감케 한다. 어로 작업중 납북됐다가 돌아온 김성학, 이진탁씨는 자신들을 고문한 그를 처벌해달라고 법에 호소해도 반응이 없자, 법원 직권으로 그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요구하는 재정신청을 냈다. 그러나 법원도 당사자 소재불명을 이유로 10년이상 재판을 미루다가 이제야 궐석재판을 택한 것이다.재판부가 이 신청을 받아들이면 사실상 그가 기소되는 효력이 발생한다.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재정신청 사건 재판이 열리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어서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이번 재판은 99년 8월에 끝나는 그에 대한 공소시효를 한동안 연장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가혹행위 및 폭행감금죄로 기소중지된 그의 공소시효는 7년으로 벌써 끝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김근태(金槿泰) 국민회의 부총재가 88년에 낸 재정신청으로 재판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규정에 따라 공소시효가 99년 8월로 연장됐는데, 이번 재판으로 또 시효가 늘어나게 된다.
법원은 『11년이나 끌어온 사건을 미제로 남겨둘 수 없다』고 뒤늦은 심리착수 이유를 밝혔지만, 대공 수사요원이었던 그를 궐석으로 법정에 세우는 데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근무할 때 물고문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으로 유명했던 그는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반인륜적인 범죄자를 궐석재판으로나마 단죄하게 된 것은 너무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다.
재판소식이 전해지자 경찰이 왜 그를 잡지 못하느냐는 해묵은 의문이 되살아 나고 있다. 못잡는 것이 아니라, 안잡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잡을 수 있을텐데 노력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하다. 경찰 관계자도 아직 특별수사반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수사가 이뤄지지않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87년 6·10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관련 경찰관들이 가석방 특사 등으로 풀려나 경찰 산하단체에 특채되고,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박처원씨 등 당시 치안본부 고위간부들은 하급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사실들이 이근안을 못잡는 것이 아니라 안잡는 것이라는 의혹을 더욱 부채질한다. 경찰은 시대가 변했음을 인식하고 고문범죄자를 붙잡아 경찰의 명예를 되찾고 의혹을 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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