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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1(문민정부 5년: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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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1(문민정부 5년:33)

입력
1998.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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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현대’ 첵랍탁공항의 분루/홍콩 공항교량공사 낙찰불구 정부 보증거절로 불발/수원민자역사 사업권도 “시간지연” 이유 애경에 뺏겨/이경식씨 “해금” 건의에 YS 먼산만 바라보며 묵묵부답올 4월 홍콩 첵랍탁공항의 완공을 보는 현대그룹의 심정은 착잡했다. 수용한계를 넘어선 카이탁공항의 대체공항으로 아시아권의 허브(중심축)를 겨냥한 첵랍탁공항의 완공은 환란의 와중에 한 푼의 외화가 아쉬운 지금, 분통터지는 기억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92년 7월 첵랍탁공항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칭마대교건설을 6억달러에 입찰했다. 칭마대교의 입찰은 홍콩반환을 앞두고 진행된 수십억달러 규모의 첵랍탁프로젝트에서 2억3,000만달러 규모의 캄수이본 교량공사 등 연계 프로젝트가 가장 많은 공사였다. 현대건설은 1년6개월여동안 신공법 연구 엔지니어 해외연수 등 상당한 경비와 노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한 결과 세계각국의 내로라는 토목회사를 누르고 최저입찰에 성공했다. 동남아시장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는 건설업계는 물론 무역수지적자에 시달리던 정부 입장에서도 반색할 일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기쁨은 잠시, 사단은 벌어졌다. 홍콩정청은 이례적으로 정부지급보증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거절해 93년 4월 영국의 트라팔가사로 공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현대건설 관계자의 회고. 『오랜 준비 끝에 칭마대교 수주에 성공했지만 국가 지급보증의 미비로 눈물을 머금고 수주를 포기했습니다. 연계공사까지 따지면 10억달러에 달할 수도 있는 공사였습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공사 등 확대일로였던 동남아 건설시장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지요. 현대가 국민당의 대선패배이후 처음으로 받았던 제재로 기록될 것 입니다. 당시 아시아권 허브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던 영종도 신공항이 계획에서는 앞섰지만 아직도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첵랍탁은 벌써 완공됐다니 참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홍콩의회에서도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국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홍콩정청이 반환을 앞두고 영국업체에 공사권을 넘기려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첵랍탁공항프로젝트는 홍콩과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였고, 그 중간에 끼인 현대건설이 희생양이 된 사건으로 건설업계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현대그룹의 금강개발은 94년 10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원민자역사 사업권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95년 1월 중도하차하면서 유통업에 새롭게 진출한 애경그룹이 새로운 사업자로 선정됐다.

철도청은 애초 주거래 은행의 투자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현대측이 투자승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수원역사사업이 너무 지연되고 있다며 1월27일 사업자취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금강개발 고위 관계자의 증언. 『한마디로 「소산」이 뒤에 버티고 있어서 비명 한번 못질러 보고 사업권을 빼았겼습니다. 애경에 주기 위해서 갖가지 구실들이 동원됐습니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현대측 주장은 당초 사업권자 모집공고에 주거래 은행 투자승인이 명시돼 있지도 않았고 철도청이 사업자선정을 취소한 당시에는 이미 정부의 투자승인제도 철폐방침이 서 있었다는 것. 실제로 투자승인제도는 그해 4월에 폐지됐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관계자는 문제해결을 거의 마무리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사업자 선정이 취소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삼았던 자기자본비율은 주무장관의 추천이라는 예외조항이 있었어요. 여기저기 불이나게 쫓아다녀서 주무장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상공부와 재무부 두 군데였지요.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시간을 지연한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승인 취소를 했습니다. 장관의 승인을 받은 다음날로 기억됩니다. 다른 민자역사들은 사업자선정후 미착공상태로 끌어오는 곳이 아직도 있습니다. 사업권을 되찾기 위해 소송준비에 착수했지만 그룹에서 「당국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고 해서 무산됐지요』

그해 10월 정기국회 건설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특혜시비는 거론됐다. 국민회의 이윤수(李允洙) 의원이 증인으로 나온 애경유지 채형석(蔡亨碩) 사장에게 사업자선정을 둘러싼 의혹을 매섭게 추궁했다. 『업계에서는 금강개발이 사업권자로 선정됐을 때 결국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는데 사실입니까. 증인이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을 때는 철도청이나 그보다 높은 고위층에서 언질을 받았다는 증거 아닙니까』 정가에서 나돈 소산 개입설을 캐물은 것이었다.

현대에서 애경으로 넘어간 수원민자역사 사업자 변경은 애경의 채사장과 소산의 측근이었던 K비서관 그리고 애경오너와 소산과의 친분이 배경이었다는 게 정설이었다.

대선패배 이후 현대그룹의 수난은 본격화했다.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에 대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감정은 문민정권 5년내내 현대그룹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대선이후 현대그룹을 가장 먼저 덮친 것은 사정의 칼날이었다. 특히 93년 한해동안은 정명예회장을 비롯, 100여명이 넘는 임직원들이 대선법 위반으로 법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사정의 칼날이 가실 때쯤부터는 다각도로 현대에 대한 유무형의 제재가 시작됐다. 대선이후부터 95년까지 3년동안 현대그룹은 대형사업을 벌일 수도, 자금을 끌어 올 수도 없이 그냥 생존에만 급급해야 했다. 현대 종합기획실 관계자의 설명. 『가장 오랫동안 현대를 괴롭힌 것은 금융 제재였습니다. 기업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돈줄이 막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지요』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는 산업은행 등 시설자금 지원동결, 해외증권발행을 통한 해외자금 조달봉쇄, 기업공개 유상증자 등을 통한 직접금융봉쇄 등 세 가닥으로 진행됐다. 시중은행으로부터 운전자금을 조달하는 것외에는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의 시설자금 조달 길은 모조리 막혀버렸다.

통치자의 의지는 확고했고, 정부와 은행권의 대응은 일사불란했다. 몇차례 대통령의 반응이 전해지면서 현대문제는 정부 관계자들도 접근하지 못하는 성역으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 모비서관의 회고. 『이경식(李經植) 한국은행 총재가 여러차례 진언을 했습니다. 정주영씨는 대선때 경쟁자였지만 한국에선 없어서는 안 될 몇 안되는 경제인입니다. 경제회생을 위해서라도 한번 만나라는 얘기였지요. 그때마다 대통령은 먼산만 바라보고 묵묵부답이었지요. 한번 안본다는 사람은 안보는 게 대통령의 성격이었지만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은행에 대해 현대를 특별히 어떻게 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문민정부 초기 서슬퍼렇던 재벌정책의 와중에 현대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대 관계자가 전하는 당시 분위기.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언론에서 제기하는 해금문제에 대해 제재가 없는데 무슨 해금이냐는 반응이었고 그룹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전혀 제재가 없다고 밝힐 정도였으니까요. 정부 당국자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안해주고 싶어 안하는 게 아니다. 입장 곤란하니 가만히 있어 달라」고 오히려 사정할 정도였지요』

현대는 공식적인 해금으로 알려진 95년 상반기 이후에도 견제는 풀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현대 관계자의 설명. 『여론에 비춰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95년 상반기에 상당수 해소됐지만 현대에 대한 견제는 문민정권이 끝날 때까지 가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제철허용 문제일 겁니다. 환란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는 얘기도 있지만 투자의 시기는 사업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아직 득실은 따질 수 없습니다』<이재열 기자>

◎‘별’을 단 현대맨들/투옥경력 “의리의 상징”/鄭명예회장 상당한 애정/대부분 복귀 승승장구

대선을 계기로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자신은 물론 정회장의 측근들도 대부분 「별」을 달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정의 칼날을 맞았던 현대맨들에 대해 정명예회장은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려운 시기에 의리를 저버리지않은 측근들은 훗날 그룹에서 승승장구했다. 국민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그룹으로 돌아와 여전히 현대그룹의 주춧돌로 남았고, 특히 투옥경력은 명예회장의 각별한 배려에 힘입어 의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민당 창당 이후 현대상선 비자금사건으로 실형까지 살았던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상선부회장은 그룹부회장을 거쳐 정몽구(鄭夢九) 회장과 같은 반열인 그룹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몽구회장도 70년대 후반 현대아파트 불법분양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만 정명예회장은 자신의 정치참여로 감옥간 아들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박세용(朴世勇) 현대상선사장은 95년부터 최근 그룹구조조정 이전까지 그룹종합기획실장을 맡아 그룹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왔다. 해외출장길에 도피생활을 해야했던 이현태(李鉉泰) 종기실장은 현대석유화학고문으로, 대선직전에 터진 중공업 비자금사건의 유탄을 맞은 최수일사장은 현대산업개발고문으로, 직원동원 혐의로 집행유예 3년을 받았던 음용기(陰龍基) 현대종합목재사장은 현대중공업고문으로 각각 건재하다.

대선당시 정명예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이병규(李丙圭) 대표특보는 대선직후부터 2년에 가까운 도피생활끝에 구속됐었고 94년 11월 문화일보 수석부사장에 올랐다가 YS측의 요구로 아산재단사무처장으로 물러나는 수모를 겪었다.

최근 인사에서 금강개발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정명예회장의 의리를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현대그룹에 대한 제재 연표

▲91.10 국세청 현대그룹에 대한 주식이동조사 발표

▲91.11 국세청 정주영명예회장 및 계열사 1,361억원 추징

▲91.12 국세청 현대상선에 대한 법인조사 착수

▲92.4 현대상선 탈세사건으로 정몽헌부회장 박세용 사장 등 구속

▲92.5 현대 계열사 신규여신 중단

▲93.1 현대중공업 비자금 관련 최수일사장 등 구속

▲94.5 현대중공업 등 3사 장외등록 허용

▲95.1 현대전자 해외투자 승인

▲3.4 현대자동차 해외증권 발행승인

▲3.28 현대자동차 산은 시설자금 배정(92년후 처음)

▲8.11 정주영명예회장 등 사면복권

▲8.14 서산간척지 준공인가

▲8.21 현대상선 기업공개(추진 5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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