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입고 치른 ‘60번째 생일파티’/한국친구들 손수나서 모임준비등 ‘소중한 순간’ 축하/미국있는 세자녀·손자들도 참석 전통 큰절 받기도/이웃·가족들과의 관계 중시 ‘따뜻한 한국문화’ 새삼느껴중국, 일본, 한국에서의 초창기 경험을 통해 나는 유교적 관습과 그 가치의 굳건한 뿌리에 대해 알게 됐다. 내 60번째 생일(환갑)을 축하할때, 나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수 있었다. 시간을 나타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방법에서는 이것은 「60년 주기」의 새 시작을 의미했다.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60년 주기는 B.C. 2697년 황제(黃帝)에 의해 시작됐다. 「식」(蝕)에 의해 결정되는 이 주기를 정확히 지적해낸 사실상의 첫 시기는 B.C. 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문명에 큰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60주기는 그후 계속 이어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물에 새겨진 날짜를 고고학자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복원해 낼수 있었다. 중국 문화의 출현에 영향받은 고대 한국문물이 이를 뒤따른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한 주기의 시작인 환갑은 상서로운 일이었다. 낙관적으로 보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고, 유교적 전통에 따라 젊은이들이 연장자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 이정표를 통과한 한국의 신사(紳士)들은 옛날에는 하얀색으로 된, 눈에 띄는 의복을 입었다. 오늘날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무료로 탈수 있고, 젊은이들로부터 전통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외 다른 특별한 권리도 갖고 있다.
60회 생일을 맞을 당시는 내가 대사로 부임해서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 의식은 몇몇 한국문화의 독특한 일면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따뜻한 감정을 더욱 강화시켜 줬다. 4월13일 하루내내 나는 한국에서는 의식, 가족, 전통, 유대감, 그리고 특별한 의식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을수 있었다. 한국친구들은 이 기억에 남을만한 행사 계획의 대부분을 떠맡았다. 우선, 노신영(盧信永) 외무장관과 그 부인은 우리 부부가 당일 및 그들 부부가 예약해 놓은 다음날 행사에 진짜 전통 한국의복을 입도록 했다. 우리는 옷을 맞추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한국 재단사에게 갔다. 그 다음 이경희(李京姬;오수인(吳壽寅) 전 프라자호텔 사장 부인)씨와 마거릿 조(나은실(羅恩實)씨;조동하(趙東河)씨 부인)가 행사를 치를 테이블이 우리 대사관저에 적절하게 설치되는 지에 대한 일을 함께 했다. 관저는 많은 꽃다발에 둘러싸인채 과자상자와 과일그릇으로 넘쳐났다.
우리 세 자녀와 배우자 두명, 그리고 세 손자는 이 행사를 위해 미국에서 건너왔다. 마거릿 조와 함께 이경희씨는 의식이 시작될 때, 그들에게 의식의 주인공앞에서 절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또다른 친구 서니 류(안경선씨)와 한국의 대표적 여류시인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모윤숙(毛允淑)씨도 함께 있었다. 모윤숙씨는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시(詩) 한수를 지어줬다. 서니는 그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각 연(聯)을 암송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 시는 내 임무가 한국국민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이 특별한 날이 젊은이들에게는 기쁨과 웃음이 충만한, 꽃이 재탄생하는 봄에 자리하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노래했다.
그날 아침 적당한 시간에 한국친구들과 우리 가족, 사저(私邸) 관리인들은 대사관저 리셉션 룸에 모였다. 아내 세니와 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여러 포장꾸러미로 가득차 있는 의식용 테이블뒤에서 양반자세로 앉았다. 우리 자녀와 아내들은 나이많은 순서대로 한사람씩 우리앞에서 전형적인 한국스타일로 절을 했다. 다음 차례는 세 귀여운 손자였는데, 그들 또한 어린이 한복을 입고 있었다. 조동하씨와 우리 장남 조프리가 수많은 축하편지를 낭독했다. 이것들은 대사관저에 도착한 많은 메시지중에서 골라 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난뒤 우리는 참모진이 참석자 모두를 위해 준비한 비공식 오찬으로 흥을 돋웠다.
오후 1시가 지나 우리는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국립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로 돼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전에 내 아내와 내가 총장인 권이혁(權彛赫)씨 부부로부터 인사를 받기 위해 제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연락받았다. 엄청난 차량행렬속에 나머지 어린이들과 몇몇 한국친구들이 뒤따랐다. 심지어 우리는 한국경찰이 제공하는 모터 사이클 호위까지 받았다.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각각의 행사들의 특별한 성격에 대해 글을 써왔다.
학위수여를 위한 공식행사와 이에 대한 나의 짤막한 연설이 끝난뒤 서울대학교의 여러 학계 동료와 친구들간의 비공식 모임와 즐거운 토의가 뒤따랐다. 여기에는 이홍구(李洪九)씨 부부도 포함돼 있었다. 이박사는 한국의 예일대 동창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나처럼 박사학위를 예일대에서 받았다. 이 훌륭한 친구는 통일원장관이 됐고, 그후 영국대사,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98년 봄 그를 주미대사로 임명했을 때, 정말 기뻤다. 이홍구씨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한국사람이 고국에 돌아와서 한미 동맹관계를 얼마나 살아 숨쉬게 하고, 또 우리의 문화접촉을 생기있게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우리는 서울 프라자호텔 꼭대기 덕수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때맞춰 돌아와서는 옷을 갈아입으며 기분을 전환했다. 내 자녀들과 김승연(金昇淵;한화그룹 회장)씨가 초대장에서 손님들을 리셉션에 모신다고 언급한 것은 한국적 전통에서 보면 적절한 것이었다. 「영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부친에 대해 내가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비록 그가 파티를 열었지만, 호의상 우리 자녀들까지 주최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한국적 전통을 더욱 강화시켜 줬다.
나는 프라자호텔에서 있었던 그날밤 리셉션에 버금갈 만한 다른 행사를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친구나 동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존경의 뜻을 표할 때가 있다. 나는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한 이 행사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도 느꼈다. 덕수홀이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적은 아마 예전에는 없었을 것이었다. 한없이 다양한 얼음조각들이 있었는데, 여러 스타일의 음식과 좋은 조화를 이뤘다.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한국과 서양의 음율이 배경음악으로 잔잔이 깔렸다. 호텔 직원들은 김승연회장의 지시대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했다.
손님명부는 몇몇 대사관 동료와 내 아내와의 상의하에 작성됐다. 이는 내가 수년동안 한국인과 함께 쌓아온 우정의 깊이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내게 깨닫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여러해 동안의 내 임기중 그들이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것이 증명됐다. 아내 세니와 나는 주최인인 「영 다이너마이트」와 그의 약혼녀(서영민(徐瑛民)씨), 우리 자녀들과 함께 리셥션장에서 손님들을 맞을 때 우리 삶이 한국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공유한 여러 경험에 의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에 대해 똑같이 실감할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의 어머니 케이 킴(강태영(姜泰泳)여사)도 거기에 있었다. 또 김상만(金相万) 동아일보 회장, 내가 일찍이 알고 지냈던 친구인 전 국방장관이자 주미대사였던 김정렬(金貞烈;「마이크」) 장군과 그의 아내도 참석했다. 전 언론인인 봉두완(奉斗玩)씨도 우리와 인사를 나눴고, 「화약그룹」 (Explosives Group;註 한화그룹을 지칭)의 핵심 참모인 오수인씨와 대사관저에서의 행사준비를 도와줬던 그의 아내도 이 일에 즐거움을 더해줬다. 나의 예일대학교 제자중 한 사람이었던 스티브 브래드너는 한국 여자농구계의 영웅인 박신자(朴信子)씨와 결혼했는데,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스티브는 40여년동안 연합사령부에서 기품있고 헌신적인 자세로 일해왔다.
특별히 한국의 두 숙녀분이 그룹에 초대됐다. 첫번째는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미 국무성 한국어 연구원」(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 일하고 있던 내 한국어 선생인 이경희(李璟姬)씨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외교가에서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또 다른 나의 제자 이경숙(李慶淑) 박사는 당시 국회 외무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녀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나와 함께 했고, 숙명여자대학교 총장까지 됐다. 나는 스승으로서 제자가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성취해가며 성공하는 것을 볼 때, 선생이 느낄수 있는 자부심으로 가득찼다. 특히 98년 봄 그녀가 4년 임기의 총장에 압도적으로 재선됐을 때 더욱 그랬다.
82년 4월13일 정말 훌륭히 고양됐던 그 모임은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일화로 자리잡았다. 양국의 문화적 전통이 아무리 상이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속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순간을 양국이 함께 할 때, 한국민과 미국민사이의 충심어린 우정이 얼마나 크게 성장할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였다.
주최인은 리셉션장에서 찍은 사진을 모은 예쁜 앨범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우리는 자주 그 앨범 책장을 넘기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비스러운 「선」(善)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곤 했다. 사실, 한국 주최인들은 우리에게 앨범을 선물해서 우리가 한국에 있을 당시 보물처럼 소중한 일화의 추억속에 잠길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는 한국에서의 여러 체험담이 진실로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나 자신에게 종종 상기시키기 위해 이 앨범들을 통한 감상적인 여행을 하곤 했다.
다음날 저녁 우리에게는 내 환갑을 위한 또 하나의 축하행사가 열렸다.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외무장관인 노신영씨와 그 부인은 서울 「한국의 집」에서 똑같은 의식용 테이블을 차려놓고 한국식 만찬을 준비했다. 마찬가지로 존경의 뜻으로 치르는 절을 하는 순서가 있었고, 많은 축배와 훌륭한 한국음식도 뒤따랐다. 그 다음 그곳의 조그만 무대에서 전통음악과 춤사위가 벌어졌다.
연이은 이틀밤, 우리 가족이 관저에 돌아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우리는 정말 기억에 남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던 행사들을 되돌아봤다. 우리 자녀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친구들에게 감사하면서 한편으로 행사를 통해 우리 관계가 그들과 친밀히 연결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미국인들이 한국문화로부터 배울것은 많다는 것이었다. 여러면에서 공감한 그 행사는 우리 자신의 가족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됐다. 한국 국민은 우정을 넓힐줄 알았다. 그리고 그 우정은 공식적인 모임을 반드시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우 그같은 행사는 우아하고 인상적인 것이었다. 우리 친구들의 따뜻한 우정은 나의 환갑을 진정 내 인생에서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어 줬다.<워커 전 주한미대사 번역="황유석"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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