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게임” 朴 수석韓 차관 전화도 안받아/朴 수석 정책 좌지우지에 ‘YS 경제가정교사’ 韓씨 “질투”/韓씨 ‘기획원 실세차관’ 부임후 朴수석과 사사건건 충돌/정책혼선만 양산한채 94년 10·4개각뒤 “화해 모임”문민정부의 「신경제」가 순항하던 93년 4월29일. 한국개발연구원(KDI) 회의실. 공정거래부문의 「5개년계획」마련을 위한 정책협의회가 열렸다.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30대 재벌 계열사간 빚보증 한도를 96년까지 자기자본의 200%이내로 제한해야 합니다. 대기업의 시장독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업분할명령제와 투자회수명령제 등의 검토가 필요합니다』
관심의 대상은 기업분할명령제. 빚보증 억제는 한이헌(韓利憲)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이후 강조해 와 새로운 게 아니었다. 독과점 우려가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강제로 기업을 쪼개도록 하자는 것으로, 「재벌해체」로 해석됐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를 지냈고 경남고 후배였던 한위원장은 박재윤(朴在潤) 경제수석에 버금가는 「실세」로 인식되고 있던 터였다. 당연히 문민정부의 신재벌정책으로 비쳐졌다.
새정부 서슬에 몸사리던 재계도 불만을 드러냈다. 「신경제 계획」을 자신의 구상대로 꿰맞추고 있던 박재윤수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정위가 도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박수석은 공정위가 아닌 경제기획원측을 채근했다.
『글쎄요. 우리와는(사전)협의가 없었습니다』공정위는 당시 기획원 산하였지만 과거 공정거래실과 달리 독립적인 기구였다. 『경위를 파악해 보고해 주세요』
같은 시각. KDI와의 정책협의회 내용이 확대해석되자 한위원장은 다른 채널로 청와대측에 보고했다. 일부 연구원의 개인의견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기획원 출신 K씨의 회고. 『박수석이 한위원장과 직접 통화했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습니다. 한위원장과의 접촉을 피하는 바람에 기획원만 애를 먹었습니다』
KDI건은 한위원장이 1주일뒤 인간개발연구원 주최 조찬모임에서 『기업분할명령제 도입은 우리 경제 현실을 감안할 때 시기상조』라고 공식 해명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YS의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경쟁관계였던 박재윤씨와 한이헌씨가 벌인 파워게임의 서막이었다.
경제부처 고위직을 지낸 A씨의 증언. 『두 사람은 라이벌 의식이 강했습니다. 한씨는 민자당 전문위원으로 있던 91년 10월 김전대통령에게 발탁된 이후 경제가정교사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92년 대선기간중에는 당시 김후보를 따라다니면서 경제분야 유세내용을 즉각 손봐주거나 발음까지 고쳐줄 정도로 측근이었습니다』 A씨의 계속된 회고. 『92년 6월 사실상 한씨의 역할이었던 경제특보에 박재윤씨가 임명되고 그는 경제보좌역을 맡게 되자 불편한 관계가 시작됐죠. 김전대통령이 민자당 소수계파 보스에 불과하던 시절 「YS캠프」에 들어갔던 한씨로서는…. 당시 YS가 주재하는 참모회의에서도 잦은 의견 대립을 보였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더구나 유세장을 따라다니던 자신은 차관급인 공정위원장에 불과한데 사무실에서 「신경제」를 다듬던 박씨는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경제수석을 맡았으니 질투가 날만도 했죠』
두 사람의 갈등은 93년 12월 중순 한이헌씨가 기획원 차관을 맡으면서 본격화한다. 쌀시장 개방파문으로 중도하차한 이경식(李經植) 부총리 후임으로 정재석(丁渽錫)씨가 기용되면서 한씨는 차관으로 기획원에 복귀했다.
그달 28일 낮 과천 한 음식점. 『나는 부총리고 경제기획원장관은 한차관입니다. 인사는 물론 주요 업무추진과 국회상임위 답변도 한차관에게 맡길 겁니다』 정부총리는 기자들에게 차관과의 역할분담을 선언했다. 한씨는 곧바로 「한 실세」로 통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청와대와 경제부처간 혼선도 잇따랐다. 94년초 성장지속이냐 안정우선이냐를 놓고 논쟁이 일더니 공공요금 현실화여부를 놓고 기획원과 청와대, 또 정치권과 설전이 벌어졌다. 정부총리가 전임자(이경식)와 달리 개성이 강한 탓도 있었지만 한차관 영향으로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이 기획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박수석은 3개월가량 정부총리와 공식적인 행사외에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일종의 협력자가 될 수 있는 한차관과는 이듬해까지 냉랭한 관계가 지속됐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B씨 회고. 『한차관이 여러 차례 박수석에게 전화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박수석은 메모만 흘쩍 볼 뿐 별다른 지시가 없었습니다. 한차관이 재차 독촉해 와 「급한 일」이라고 전하자 연결이 됐습니다』 박수석은 평소 업무에 관한 일이라면 기획원 과장들과도 수시로 통화했고, 「콜백」도 해 줄 만큼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때문에 전화해프닝은 두 사람의 「파워게임」외에는 다른 이유를 대기 힘들었다.
94년 4월27일 김영삼 대통령 주재 신경제추진회의. 통상 대통령 주재 회의는 청와대에서 열렸으나 이날은 정부과천청사에서 개최됐다. 뿐만 아니다. 관례를 깨고 한차관이 직접 경제현안을 보고했다. 이전까지 부총리의 몫이었다.
경제부처 C국장의 설명. 『이전까지는 박수석이 사전에 보고자료의 명칭까지 챙겼으나 그 회의는 철저히 기획원 주도로 진행됐습니다. 김대통령이 참석하는 신경제회의가 매달 과천에서 열리게 된 것도 그 때부터죠』
한차관이 버티고 있던 기획원의 목소리는 점점 커갔다. 다음달(5월) 2일 대통령 독대를 마치고 나온 정부총리는 21세기에 대비한 「경제국제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경제국제화기획단이 설치됐고, 단장은 실세 한차관이었다.
『그러면 신경제 5개년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함께 추진될 겁니다. 지난해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이후 우리 경제의 새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선 산업·금융정책 등에서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해졌습니다』
기획원의 설명은 「신경제 5개년계획의 연장선」이었지만 실상은 「신경제」를 흔드는 것이었다. 신경제가 5년짜리였으나 국제화계획은 10년이었고, 각종 거시경제지표 목표치도 새로 제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 650명이 참여, 향후 1년간 성안토록 돼 있었다. 신경제는 박수석이 6개월간 준비했지만 부처 실무자들이 참여한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신경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박수석과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한달뒤 신경제추진회의 안건을 놓고 경제수석실과 기획원이 충돌했다. 박수석은 사회간접자본(SOC)기획단이 마련한 보고서를 제시했고, 기획원측은 하반기 경제운용계획과 중소기업대책을 내세웠다. 조정이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신경제추진회의는 기획원안대로 진행됐고, SOC투자 보고대회는 독자적으로 열렸다. 박수석이 재무부장관으로, 한차관이 경제수석으로 옮긴 그해 10월까지 청와대 파견자 인사 등 사소한 일까지 잡음이 일었다. 그해 경상수지는 45억3,000만달러 적자,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2% 등으로 「신경제」는 『정치인의 선거공약은 공약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여건에 따라 신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행정이다』는 정부총리의 예언(94년 2월 국회답변)대로 됐다. 청와대와 경제부처간 파워게임이 부른 화(禍)라면 지나친 평가일까. 신경제도 국제화계획도 YS임기와 함께 「슬로건」으로 끝났다. 박재윤씨와 한이헌씨는 94년 10·4개각 직후 홍재형(洪在馨) 신임 부총리 주선으로 화합의 모임을 가졌다. 한씨는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예우했지만 그 사이 혼선이 초래한 결과는 너무 컸다.<정희경 기자>정희경>
◎경제수석 역할론/“심부름꾼” 강조불구 부총리와 주도권 경쟁/박재윤·한이헌 수석 “우위”
『대통령이 경제정책의 큰 틀을 짜는데 필요한 판단자료를 충분히 제시하는데 비중을 둬야 한다. 부총리와 경제부처장관 등 경제팀이 구성되면 심부름꾼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각오뿐이다』(박재윤·朴在潤/93년 2월18일)
『경제정책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이 발전기이고 내각이 전등이라면 경제수석은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전깃줄에 불과하다. 빛을 내는 것은 내각의 몫이다. 전깃줄이 발전을 하거나 빛을 내려 들면 무리가 따른다』(한이헌·韓利憲/94년 10월5일)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내각을 연결시키는 것이 경제수석의 역할이다. 얼굴없는 보직이며 자기의 주장을 살릴 수도 없고 살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부총리를 도와 잘 협조해 일할 생각이다』(김인호·金仁浩/97년 2월28일)
문민정부시절 경제팀의 수장은 부총리만은 아니었다. 경제수석이 실세면 경제팀의 무게중심은 청와대에 있었다.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단합하라』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 그리고 그림자 역할을 하겠다던 경제수석들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이경식(李經植)씨는 『박재윤 수석은 김대통령이 민자당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시점에서부터 신경제를 준비해 왔기 때문에 2월 들어서 신경제를 접한 경제팀에 비해 수압(水壓)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수압론을 펼치기도 했다. 박재윤 한이헌 이석채(李錫采)씨 등은 경제수석당시 주도권을 장악하며, 각각 「신경제」「세계화」「경쟁력 10%이상 높이기」등을 밀어부쳤다. 반면 김인호씨의 경우 강경식(姜慶植) 당시 부총리와 호흡이 「너무 잘맞는」 바람에 환란(換亂)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제수석의 독주는 물론 경제수석과 부총리의 완벽한 하모니도 「정답」은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최선의 경제팀 만들기는 대통령의 몫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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