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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가정/서화숙 문화과학부 차장대우(여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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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가정/서화숙 문화과학부 차장대우(여기자 칼럼)

입력
1998.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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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을 만난 것은 가계부 취재 때문이었다. 남자가 63년, 취직한 이듬해부터 가계부를 썼노라고 했다. 은행 지점장으로 정년퇴직했다는 이선생 부부는 경기 성남시 분당의 작은 아파트에서 노모를 모시고 자녀 셋과 살고 있었다. 동네 찻집으로 나온 이선생은 깃이 닳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그가 가계부를 쓰는 방식은 특이했다. 남들은 수입과 지출만 기록하는데 그는 기업의 회계장부처럼 가계부를 썼다. 장농 텔레비전등 모든 살림살이를 값어치대로 적어서 집안의 총자산을 기록했다. 이 자산은 감가상각을 감안, 해가 갈수록 가치가 떨어졌다.

가령 냉장고를 100만원에 사면 이듬해에는 90만원짜리로 기록했다. 산 지 5년만에 도둑 맞으면 50만원 손실로 기록한다. 또 식구마다 계정을 따로 두었다. 『자녀 셋에게 들어간 용돈 옷값 학비 등을 따로 계산해야 한 명에게 쏠리지 않는다』고. 병원비만은 공통계정으로 잡았는데 『아픈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는 안되기 때문』이란다. 그가 35년 동안 써온 가계부를 보면 한 사람한테 평생 들어간 돈이나 특정항목에 소비한 돈, 자산이 늘어난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재산은 아파트 한 채가 전부. 『물려받은 재산 없이 검은 돈에 손 안대면 이만큼 사는 것이 맞다』고 그는 말했다. 존경스럽긴 해도 남편이 이러면 고생이겠다 싶었는데 아내는 딴판이었다. 50대 중반의 고교 교사인 아내는 해맑은 인상에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맞벌이하며 간장 된장 담가먹으면서도 늙고 찌들지 않은데 대해 아내는 『부부사이가 투명해서』라고 들려주었다.

남편은 비자금이 없으니 아내 몰래 하는 짓이 없었다. 아내도 그랬다. 자연 의논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선생은 『인생을 바르게 살았다면 퇴직했다고 고개 숙일 필요없다』고 했다. 투명한 가정에선 가난이 위기가 아니라며.

IMF 이후 남편에게 엄청난 빚(주로 주식투자를 위한 은행대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통을 겪는 중산층 주부들이 많다. 남편은 돈 버는 기계로, 아내는 잠자리상대로 살아온 부부간에 균열의 소리도 크다.

교사에게 돈봉투를 주면서 뇌물 먹는 공무원을 비난할 수 없다. 투명에서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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