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 거 별개 아닙니다” 소동/朴수석, 李부총리·宋KDI원장 발언듣고 “해명하라”/실명제 번복등 갈팡질팡… 강봉균 차관보 경질 요구/부총리·장관보다 높아… YS에 앞서 재계총수 면담도「신경제 100일 계획」이 가동된지 한달여가 흐른 93년 4월 민자당 의원워크숍. 서상목(徐相穆) 의원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신경제」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경식(李經植) 부총리와 송희연(宋熙秊)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이 연사로 참석했다.
『우리 경제는 86년부터 6년간 평균 10%가량 성장했습니다. 지난해 5.1%로 성장률이 낮아졌지만 앞으로 1∼2년간은 이런 상태에서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절대 팽창정책을 써서는 안되고 긴축정책을 유지해야 합니다』 송원장의 발언은 「신경제 100일 계획」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어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부총리의 발언도 불을 지폈다. 『신경제 100일 계획이 뭡니까』라는 모의원의 질문에 『거, 별개 아닙니다. 개혁을 하기 위해 경제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일종의 정지작업입니다』 이부총리의 회고. 『「별개 아닙니다」는 「그건 이렇습니다」의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부총리가 새정부의 핵심정책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 알려지면서 소동이 벌어졌죠』 박재윤(朴在潤) 청와대 경제수석은 즉각 이부총리와 송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명을 요구했다.
당시 금융실명제와 금리자유화 조기 실시 등과 관련, 경제부처가 발표해 놓고 며칠만에 번복 또는 해명하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재정경제부 고위 간부의 설명. 『재무부 경제기획원 등이 협의를 거쳐 추진하기로 한 사안을 박수석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바꿔야 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방안도 5월말까지 마련하기로 하고 발표까지 했지만 모장관은 「내입으로 얘기한 적 없다」고 후퇴했죠』 경제수석은 차관급. 하지만 박수석은 부총리와 재무장관 위에 있었다. 때문에 이부총리의 경우 「이주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해 5월초. 『강봉균(康奉均) 차관보를 경질해 주십시오』(박수석)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능한 사람입니다』(이부총리) 『그 사람하고 일을 못하겠습니다』(박수석)
이부총리는 강차관보를 불렀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다음번 차관승진때는 「퍼스트(FIRST)」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강차관보는 김태연(金泰淵) 대외경제조정실장과 자리를 맞바꾸었다. 같은 1급이었지만 강등이었다. 하지만 이부총리가 먼저 퇴진하는 바람에 강차관보에 대한 승진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같은달 13일 송희연 KDI원장도 사표를 냈다.
송원장(현재 아시아개발연구원장)의 회고.『행사전날 신경제 100일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해달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긴축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후 관계도 불편했고 특별한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획원 출신 고위간부 K씨의 설명은 이와 다르다. 『송원장 역시 강차관보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봅니다. 5월초 공정거래위원회와 가진 재벌개혁관련 세미나 건도 한몫 했습니다』(세미나에서 제시된 재벌의 소유구조개선방안중 기업분할명령제도가 「재벌해체」로 해석되면서 청와대가 진상파악에 나서는 소동이 빚어졌다)
5월을 전후해 정책혼선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자 2주일에 한차례 부총리의 대통령 「독대」가 만들어졌다. 박수석의 영향력도 조금씩 약화하는듯 했다.
6월27일 오후6시10분 스위스그랜드호텔. 일요일인데도 최종현(崔鍾賢) 선경 김상하(金相廈) 삼양사 최원석(崔元碩) 동아 장치혁(張致赫) 고합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 22명이 모였다.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여러번 망설였으나 결례를 무릅쓰고 모셨습니다. 김대통령은 기업과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들이 생각하듯 재벌에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 정책은 경쟁력 강화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지 특정기업에 손해를 주려는 게 아닙니다』 박수석은 재계총수와의 첫 회동에서 신경제5개년계획의 추진배경을 설명하며 기업에 대한 사정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이날 회동은 그러나 배경이나 초청방식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당시 비서관 L씨의 설명. 『김대통령이 취임전 재벌들로부터 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몇달이 지났는데도 일체 면담을 하지 않자 재벌들이 불안해 했습니다. 새정부 경제정책을 설명할 겸 불안감도 떨쳐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다른 증언도 있다. 『회동 1주일전 박수석이 참석대상을 정해 주요그룹 총수에게 직접 전화로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김대통령에게 사전에 충분히 모임 성격을 설명하지 않은 탓인지 질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김대통령은 그로부터 1주일뒤 재벌총수들과 취임후 첫 회동을 가졌다)
박수석은 그해 8월12일 단행된 금융실명제 실시작업에서 철저히 배제됐고, 이로 인해 경제부처 장악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신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직 고위관리 L씨의 회고. 『김대통령이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에 참석하기 직전인 11월이었습니다. 박수석이 테니스를 하다 인대가 끊어졌는데도 다리를 절뚝거리며 현지(미국)까지 수행했습니다. 주치의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대통령에게 보고, 김대통령이 박수석에게 당장 입원치료받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됐던 듯 김대통령은 이후 각종 행사에서 「열심히 일하다 실수하는 사람은 용서해도… 」라는 말을 했습니다. 비서관들이 써 주지 않은 대목이었는데…』
박수석은 열성적이었다. 신경제 100일계획을 입안할 때는 아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두고 밤샘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보고서 내용이 논리적으로 납득될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당시 비서관 출신 A씨의 설명. 『박수석은 「신경제가 실패하면 감옥간다는 각오로 일하라」고 독려했습니다. 외부인사와 저녁식사후 집으로 들어가는 때면 집으로 연락하도록 팩시밀리까지 설치했습니다』 『94년 후반에도 평일에 밤늦게까지 남아있는 일은 줄었지만 의욕은 대단했습니다. 종종 일요일 오후에 스위스그랜드호텔로 모이라고 지시한뒤 그곳에서 자동차산업 등에 대한 프리토킹을 했습니다』 『신정부 초기에 대통령에게 재벌총수들을 만나 의욕을 북돋워주는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처음엔 내 얘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실명제를 단행하고 나서 재벌총수들을 만나야만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건의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 이 건을 포함, 2∼3건 밖에 없었습니다』 박수석은 94년 6월 경주 힐튼호텔에서 열린 금융학회 워크숍에서 대통령의 신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박수석의 의욕은 94년 10월 재무장관, 2개월뒤 통상산업부장관으로 자리를 바꾸어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95년 2월. 통산장관시절. 박장관은 워드프로세서로 직접 작성한 친서를 전직원에 돌렸다. 『통상산업 가족 연찬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연찬회는 우리부가 일등부처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노력의 일환입니다』 1월부터 매달 첫번째 토요일 연찬회를 갖기로 했는데 직원들의 출석률이 저조하자 초대장형식으로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산자부 간부 B씨의 회고. 『토요일이어서 직원들이 꺼리는 것은 당연했죠. 한번은 영화배우 장미희씨를 외부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장미희씨가 생일이라고 주저하자 박장관은 사무관 몇명에게 축가준비를 시켰습니다. 「내가 영화배우 축가나 부르려고 공무원이 된 줄 아느냐」고 담당 사무관들이 반발했고, 장미희씨 초청건은 무산됐습니다』 박장관은 특히 재임기간내내 당시 재정경제원 등과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거나 이견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려 불만을 사기도 했다. 산자부 C씨의 설명. 『박장관이 재경원장관을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노출되면 마이너스 요인이 될까봐 이를 야기시키는 직원들은 문책하기도 했습니다』 박재윤씨는 통산장관을 지낸뒤 올초까지 금융통화운영위원을 맡았다. 문민정부내내 쉬어본 적이 없었다. 「신경제」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지금도 후배나 지인들에게 신경제입안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다.<정희경 기자>정희경>
◎박재윤 그는 누구인가/YS후보시절 ‘경제 과외교사’/문민5년간 화려한 공직생활 “열성적” “경제파탄 책임” 評갈려
「문민정부」경제팀에서 박재윤(朴在潤)씨만큼 화려하게 공직생활을 한 사람은 없다. 92년 6월 김영삼(金泳三) 민자당대통령후보의 경제특보, 김대통령 취임이후 94년 10월까지 경제수석, 이후 재무부장관 통상산업부장관 금융통화운영위원. 그가 바라던 경제부총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김대통령의 재임 5년간 공직에서 떠난 것이라곤 통산부장관에서 물러난 96년말에서 2개월 정도다.
서울대 교수 시절 「비주류」로 꼽혔던 그가 어떻게 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었을까. 박씨는 김대통령이 후보시절 매주 2일씩 가졌던 경제과외공부 개인교사였다. 때문에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와 전병민(田炳旼)씨가 주도한 「임팩트코리아」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지난해 4월 한보청문회에서 『대선기간동안 선거운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현철씨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깝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한 적이 있으나 현철씨의 발탁설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다.
박씨에 대한 평가는 「신경제」만큼이나 엇갈린다. 『헌신적이고 열성적으로 일한 사람이다』 『굳이 경제파탄의 책임을 따진다면 강경식(姜慶植) 전부총리보다는 그에게 해야 한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A씨의 회고.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이죠. 대통령후보 경제특보 제의를 받아들이며 곧바로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것이나, 채택될 지 불투명한 「신경제」성안을 위해 밤낮없이 일한 것등이 대표적입니다. 다행히 김영삼후보가 당선되고 「신경제」가 새정부 경제운영의 틀이 됐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박씨는 서울대 고별강연에서 『학자의 차선은 현실에 참여해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YS팀에 합류한 배경을 설명했다. 또 YS가신들로부터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자신이 세운 원칙에 어긋나는 청탁은 물리쳤다. 한국경제가 기로에 섰던 93, 94년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그에게 역사는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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