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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급들의 만남 화요골프회(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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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급들의 만남 화요골프회(한국의 추억)

입력
1998.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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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광 全씨 美8군 입장 퇴짜맞기도/정래혁·민기식·정주영 등 政·軍·經 지도자와 정기교류/참석자 20명∼25명선… 대화내용은 일체 보안유지/韓美 현안 이견때마다 “청와대에 메시지 넣어달라” 부탁시대가 바뀌고, 기억이 희미해지면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여러 사건들을 이전 세대와 같은 관점이나 비중을 갖고 보지않게 마련이다. 아마도 이렇게 변화하는 패턴은 「화요골프회」(TMGA;Tuesday Morning Golf Association)의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 그룹은 한국군 및 미군의 장관(將官)급 간부들의 통상적인 모임에서 비롯됐는데, 60년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냈던 조지 데커 장군이 당시 용산에 처음으로 9홀짜리 골프코스를 개장하면서 시작됐다. 그 골프코스가 18홀로 확장된 66년, 이 그룹은 보다 공식적인 조직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중 함께 싸웠던 많은 한국민과 미국민이 상호 우정과 존경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던 때였다. 또 미국제개발처(USAID) 프로그램과 미래 한국지도자들에 대한 초창기 졸업생 훈련과정이 양국 지도자들간 상호 이해증진을 친밀히 하는데 기여했던 때이기도 했다. 60∼70년대에는 민주화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가 있었다. 전직 군인사의 전제적 통치방식은 명백히 대중적 인기가 없었다. 반면 많은 한국사람들은 이 사회가 규율과 행정적 능력, 사명감, 동지애, 그리고 개발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수긍했다. 이런 것들은 그와같은 능력이 필요했던 한국의 위기상황때 많은 군간부들이 보여줬던 것들이었다.

많은 군지도자들은 정부 혹은 산업계에 진출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직적인 관리능력으로 한국을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들 군지도자들은 후에 박정희(朴正熙) 정권하에서 번영을 구가하며 산업계의 거목으로 떠올랐으며, 그중 몇몇은 화요골프회의 회원이 됐다.

내가 미 대사로서의 일상에 적응한뒤 한국과 미국의 많은 친구들은 나에게 화요골프회의 회원으로 참여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화요골프회를 모르는 중요 인물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들의 제안에 따라 나는 당시 용산에 있던 미군 골프코스에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 골프코스는 지금은 한국정부에 양도됐지만, 이미 나는 그것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수도에서 점증하는 미군의 존재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많은 비판가들의 눈에 미국민은 점령권력처럼 비쳐졌다. 정보에 밝은 많은 한국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도쿄(東京)에 있는 「퍼싱 하이츠」(Pershing Heights;퍼싱미사일 기지)가 일본에 양도됐으며, 그들은 또한 서로 적(敵)의 관계였다는 것을 지적했다. 게다가 그 땅은 한국에서 가장 값비싼 부동산 지역중 하나였다. 반면 한국정부는­많은 전직 군 지도자를 포함해­미군이 계속 주둔해주기를 갈망했다. 미군의 존재는 베를린이나 서독에서 이미 증명됐듯이, 북한의 공산정권 입장에서 또다른 오판을 저지시키는 일종의 덫이었다.

내 골프레슨에는 프랭크 히키라는 용산의 실력있는 「프로」 골퍼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미군부대에 근무했는데, 한국여성과 결혼했다. 피터 킴이라는 그녀의 남자형제는 미국 대학미식축구 우승팀의 스타급 키커였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그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많은 한국의 운동선수들중 미국의 관심을 불러모은 첫 한국사람이었다. 히키의 지도하에 나는 내가 조그마한 소년이었을때 알았던 것들을 다시 배울 수 있었고, 화요골프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모임은 여름에는 아침 6시, 겨울에는 6시30분이라는 이른 시간에 가졌다. 내가 가입할 때까지 화요골프회는 목요일에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날이 모두 영어로는 「T」자(字)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모임을 화요골프회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우리는 골프를 먼저 친뒤 클럽회관에서 아침을 먹었다. 겨울에는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아침을 먼저 먹고, 그 다음 매서운 날씨속에 9홀을 돌았다. 많은 미국 친구들은 강건한 한국인들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벌벌 떠는 추운 날씨에도 거의 면역이 돼있는 것 같았다. 반면 나같은 초보자들에게 겨울은 유리하게 작용했다. 왜냐하면 많은 물웅덩이가 단단히 얼어붙어서 골프공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임기중 비가오건 눈이오건 진눈깨비가 내리건 혹은 덥건 춥건, 어떠한 날씨에도 화요골프회는 열렸다. 얼마나 대단한 친구들이었던지!

나는 이것이 진정 탁월한 지도자들간 훌륭한 모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한국전 당시 어느정도 실전경험이 없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 가입했을 때 화요골프회는 현직 혹은 전직 군간부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많은 민간경제 지도자들은 정기적인 모임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들은 모두 서울 외곽지역이나 해외에 할일이 많은 바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보통 20명에서 25명선에 불과했다. 아침식사중의 대화는 활기가 넘쳤고, 우리는 보안이 유지돼야 한다는 것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오가는 정보에 대해서는 어떠한 귀책(歸責)이나 직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화요골프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 79년 12·12 쿠데타이후 4성장군이 되기전인 80년 봄에 있었던 일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전대통령은 그때 많은 보안요원을 대동하고 미8군 골프코스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 장소에서는 심지어 정부 각료들에게조차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시 그곳은 미8군 영내였기 때문에 전장군과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원만하지 못했던 존 위컴 장군은 그렇게 많은 수행인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전장군은 불쑥 떠나버렸고, 다시는 거기에 나타나지 않았다(사실 그는 열렬한 골프광이었다). 이 이야기는 서울장안에 퍼졌고, 전대통령 임기중 미군시설에 대한 비판을 어느정도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요골프회의 중요성은 점차 시들해졌다. 그리고 많은 한국사람들은 지금 그것을 「옛날 일」로 간주하고 있다. 내가 거기에 있었을 당시 그 모임은 비공식적인 중요한 조직이었다. 나는 내 몇몇 전임자들이 그것을 교류를 가져야 하는 유용한 모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회고록 전편(前編)에서 필립 하비브 전 미 대사의 경우, 이런 개인적 친분관계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를 언급한바 있다. 그는 골프를 시작한 후 열렬한 골프광이 됐는데, 딕 스틸웰 장군과의 많은 견해차를 골프코스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내 임기동안, 그리고 80년대 후반 한국군과 미군간의 특별히 밀착된 관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었다. 또 그때 화요골프회는 미군과 대사관 요원들 사이에 일어났던 몇몇 상이한 견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데 기여했다.

내가 함께 골프를 치고, 이른 아침 활발히 의견교환을 했던 화요골프회 회원명단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정말 나에게는 행운의 모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한국친구들은 아마도 내가 지금 언급하는 몇몇 인사들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민복기(閔復基) 전 대법원장, 김상만(金相万) 전 동아일보 회장,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민기식(閔耭植) 전 육참총장, 정래혁(丁來赫) 전 국회의장, 박동진(朴東鎭) 전 외무장관 및 주미대사등이었다. 그때 이미 예편한 이치업(李致業) 여단장도 있었는데, 우리들에게는 「스피드 리」라고 불렸다. 그는 매우 정력적인 사람이었고, 사실상 화요골프회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이들 많은 지도급 인사들은 박대통령의 충성파들이었는데, 전대통령은 너무 어려서 부적절한 후계자라고 여기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들중에는 화요골프회에서 내가 정말로 같이 골프를 치고 싶어한 특별한 한 친구가 있었는데, 정일권(丁一權)이라는 한국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 일본사관학교를 졸업, 한국군 참모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전역후에는 터키 프랑스 및 미국 주재 한국대사가 됐다. 그는 후에 외무장관, 국회의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됐다. 정씨는 집권당의 충성스런 당원이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사교적인 만남으로 경제계 및 정부와 엄청나게 많은 접촉경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씨는 활기있고, 유쾌함을 주는 대화상대자였고, 훌륭한 정치평론가였으며, 한담(閑談)도 잘하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네살반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식으로 그에게 특별히 경의를 표했다. 나는 그가 60년대초 대사로 있던 미국에서, 그리고 국무총리로 일했던 73년―당시 나는 한국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같은 직책에 있었을 때 이미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요골프회내에서 특별한 우정을 나눌수 있었다.

나는 화요골프회 「포섬」(4사람이 두패로 나눠하는 경기)에서 정씨와 함께 자주 게임을 했는데, 그는 그때 농담으로 나를 즐겁게 했고, 또 나를 놀려대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내가 드라이버 샷을 막 하려고 할때 농담을 던져 나를 혼란스럽게 했고, 그때마다 나는 나쁜 샷을 날리곤 했다. 한번은 5번째 샷을 칠때 나는 그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정일권씨, 당신 그런 얘기해서 나를 또 일부러 혼란스럽게 만들 작정이지요?』 그는 웃으면서 『바로 맞았습니다, 대사님』하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한미연합야전군의 부사령관(DCINC)은 한국의 4성장군이었는데, 그의 영어실력과 군경력, 세련됨은 그에게 우리 군부대간의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져다 줬다. 유병현(柳炳賢) 장군 (전 합참의장)은 한국에서의 내 임기 일정기간중 주미 한국대사로 일했고, 한미안보연구협회에서 함께 가깝게 일해왔는데, 부사령관이었다. 박노영(朴魯榮) 장군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부사령관이었다. 그와 그의 후계자중 한사람인 한철수(韓哲洙) 장군(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후에 대만 브라질에서 한국대사로 일했는데­은 화요골프회를 통해 좋은 친구가 됐다. 한장군과 그의 품위있는 부인은 특히 세니와 나에게는 가까운 사이였다.

70년대 박정권하에서 한국은 정말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경제계와 정부내 많은 지도자들에게 골프는 대중적인 스포츠가 됐다. 초창기에는 약간 사치스러운 것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말까지 한국사람들은 골프코스를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또 현대의 문명화한 삶의 긴장을 풀고, 견해를 교환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는데 스포츠가 할수 있는 역할을 이해하게 됐다. 확실히 그것은 화요골프회에 가입한 나에게는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미 대사로서 청와대에 메시지를 보내거나, 북한의 현 상태에서 야기되는 안보상의 문제에 관한 견해를 교환하는데 화요골프회에서의 (여러 인사들과의) 접촉을 이용할 가능성은 있었다. 윌리엄 리브시 한미연합사령관은 내가 열렬한 골프광으로 거기에 있던 3년동안 화요골프회의 회원으로서 매우 열성적이었다. 수요정기조찬모임에서 우리는 때때로 미국의 외무·국방정책에 대해 다음날 화요골프회에서 논의하기를 바랐던 메시지들을 얘기하곤 했다. 우리는 대사나 한미연합사령관이 제시하는 의견은 무엇이나 청와대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과, 이 경우 우리는 골프파트너에게 그들이 나서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해 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요골프회가 왜 특별한 부분을 차지할까? 왜 나는 그것을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다음이 몇가지 이유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관심을 유발하는 다양한 분야의 현안에 대한 정보와 비공식적인 견해를 얻을 수 있었다.

화요골프회는 군대와 외교집단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직위에 따른 예의에 의해 구애받지 않고, 우정을 발전시킬 기회로 작용했다. 아무튼 내 골프실력은 나로서는 한번 도전해볼만큼 훌륭하지는 못했다.

한국사회의 다른 부분들, 특히 중요한 경제부문에 대한 통찰력을 넓힐 기회가 됐다.

화요골프회는 외교관이 반드시 케케묵고 답답한 일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기회였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로 신뢰할수 있는 친구들사이에 솔직하게 정보와 견해를 교환할 기회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요골프회의 원 취지의 상당부분은 한국의 방위편성이 더이상 미국의 원조나 조언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게 됨에 따라 바뀌었다. 보다 복잡한 세계에서 우리의 동맹관계는 광범위한 교우관계에 의해 확장돼 왔다. 다른 양국간 활동은 조직을 활성화시켜, 첨단 전자 및 항공분야에 대한 관심에 맞게 이를 조정시켜 왔다. 만약 화요골프회가 이전 열정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듣기에 군경력이 적은 새로운 세대 지도자에 해당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양국 문화간 친밀한 관계와 안보상의 관심사의 여러 전통을 수행하기 위한 비슷한 어떤 것에 대한 존재 필요성은 분명히 있었다. 화요골프회는 몇몇 주요 정책상의 문제점을 극복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됐던 친구들 사이의 견해와 계획을 상호 교환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화요골프회는 내 임기중 몇몇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때, 나에게 정말 가치있는 모임으로 작용했다.<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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