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읽은 신문기사 한 토막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말레이시아 국민은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지난해 9,10월쯤 환란의 징후가 나타났을 때 우리나라 정부 고위당국자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거나 주장을 편 분이 있었는지 모른다.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있었다 치더라도 국가가 부도위기에 몰렸다는 걸 알고나서는 언감생심 그런 주장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안락한 마음으로 도(道)를 즐긴다는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생활의 아취로 삼고 있었던 조선시대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IMF에 머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가난에 안주했을 것이다. 그게 국가 체면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명분이 있는 선택이라 단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작년 11월에 헐레벌떡 IMF 슬하로 몸을 던졌다. 머리를 숙이느니 가난을 즐기느니 그런걸 가늠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와서는 오히려 누가 구제금융 요청을 지연시켰나 하는 책임문제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국가경영을 맡았던 분들끼리, 윗분은 「말했다」하고 아랫분은 「그런 말씀 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두마디 말 사이가 국가운명이 걸린 갈림길인양 정계의 분란으로까지 번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들에게는 한때 높은 자리에 있던 분들끼리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하고 한때는 임명하고 임명받는 돈독한 사이였던 분들이 세상이 바뀌자 서로 등을 돌린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도가 없는 세상에 의리인들 논할 수 있겠는가?
요즘 흔히 환란사태를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하지만 임진왜란도 6·25 못지않은 국난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관군이 연전연패를 하자 임금 선조는 별 수 없이 도성을 버리고 서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도망을 친 것이다. 도망가는 중에도 당연히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책임으로 친다면야 국정 최고 책임자인 임금(선조)일 수 밖에 없다.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면서도, 동파역에 닿아서도 가슴을 치며 울기만 했다.
대신들 사이에서 네탓 내탓이 무성하게 오갔다. 결국 대간(臺諫)들이 입을 모아 총리(영의정)의 탓이라 결론지어 탄핵을 했다. 임금의 바로 아랫자리이니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임금은 곧 총리 이산해를 파직하고 다음자리(좌의정)에 있는 유성룡을 후임에 임명했다. 이때 서애 유성룡은 완강하게 버티었다. 『나라일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제탓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이산해는 함께 재상자리에 있었거늘 어찌 저 혼자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구원병을 이끌고 와서 왜군을 격퇴시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공공연히 선조의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후임 임금으로는 이덕형이 적임자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을 때 당사자인 이덕형은 말할 것도 없고 유성룡 이항복 윤두수등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서 『국사를 그르친 죄는 신하들에게 있다』고 항변해 사태를 가라앉힌 것도 따지고 보면 위태로운 중에도 국가 주체성을 지키려는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국가나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조그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내부에 어려움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네탓 내탓이 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모두 생각해 보자. 내탓이라고 자책한다 해서 정말 몽땅 내탓이 되겠는가. 네탓이라고 목청을 높인들 정말 네탓으로만 돌아가겠는가.
진실은 가려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고 일시적으로 국민은 속일 수 있어도 역사는 영원히 속일 수 없다. 이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탓이지만 선두에 서기를 자청해서 국사를 맡았던 분들은 그만큼 책임도 짊어지고, 값도 치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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