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에는 살생부(殺生簿)가 나돌고있다. 30대그룹을 ▲자력으로 살 수 있는 그룹 ▲금융지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룹 ▲포기할 그룹 등으로 나눈 것이다.금융지원으로도 회생이 불가능한 것으로 지목된 그룹들은 지금 난리다. 금융기관들이 신규대출을 중단한 것은 물론 아예 대출금의 회수에 나섰고 자재를 공급하던 거래선들이 계속 공급할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다. 해외 거래선들도 나서 『어찌 돌아가고 있느냐』고 물어오고 있다. 근로자들까지 뒤숭숭한 분위기여서 일부 기업은 아예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다.
이같은 혼란의 진원은 고위 당국자의 말 한마디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가 끝난 뒤 당국의 고위관계자는 「명단작성 작업에 들어갔음」을 시사했다. 이제와서 『살생부는 없다』고 진화에 나서고 있으나 일단 불붙은 대량학살설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당국자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처럼 일파만파 파장이 크다. 그런데 당국자들은 말 한마디가 미칠 파문을 전혀 고려치 않는 것 같다. 창구조차 정리되지 않아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재계에 더욱 부담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정치인 발언이다. 최근 여권의 한 중진의원은 『협조융자를 받은 기업이 또 돈을 달라고 한다』며 『은행이 무슨 수로 돈을 대겠느냐』고 했으나 바로 다음날 그 기업에 대한 협조융자가 사실상 결정됐다. 또 『6월부터는 민간기업과 공기업의 구조조정 성과가 본격화할 것』이라고 했으나 공기업정리는 6월이 돼야 기본계획정도가 마련된다.
어려운 때인데다 새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되지 않아 기업은 물론 국민들에게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의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공다툼 벌이듯 쏟아내는 당국자들의 앞서가는 말은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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