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갖고있다. 조선 500년간 왕실과 조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민간의 사건 사고 행사 풍속까지 낱낱이 적어 시대상을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1,866권이나 되는 이 방대한 기록이 왕조사 중심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 것은 엄정한 객관성과 중립성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97년 10월 이 기록을 인류의 기록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이를 인정한 것이다.조선왕조실록의 칼같은 역사의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특히 사관들의 직필은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다. 왕의 실정을 비난하는 지방유생의 상소문을 받아 본 임금이 겉으로는 충정이 가상하다고 말하면서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보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니 과연 상소내용이 얼마나 시행되겠는가』고 기록했을 정도다.
작가 신봉승씨는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 조선왕조실록이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켜온 비결을 세 가지 규범에서 찾았다. 첫째는 돈의 유혹과 권력의 회유에 굴하지 않았던 젊은 사관들의 선비정신, 둘째 반드시 해당임금이 죽은 후에야 실록을 편찬하는 제도, 셋째 누구도 부왕의 기록을 열람할 수 없는 금기였다. TV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면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던 태종 이방원은 부왕의 실록 편찬을 명하고 일의 진척에 큰 관심을 갖지만 그것을 읽어 볼 생각은 먹지도 않는다.
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은 실록청으로 개편되어 곧 실록편찬에 들어갔다. 사관들이 그동안 써 보관해온 사초를 제출하면 공정하게 기록된 것들을 선별해 제일초(第一草)로 삼아 논의를 거듭하고, 여기서 재초를 뽑아 다시 논의와 심사를 거듭한 끝에 삼초를 가려낸다. 이런 과정에서 채택된 삼초는 문장에 능한 사관이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해 인쇄과정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강원도 오대산, 강화도 정족산, 평안도 묘향산에 있는 사고로 보내 보관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병란속에서도 온전히 보관돼 지금 남북한 모두가 완전한 실록을 갖게 되었고, 근래에는 국역사업까지 끝나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서 배우려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의식이 남긴 유산이다.
근래에 이런 전통이 다 무너진 것같아 가슴 아프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통치기록을 모두 갖고 갔다는 보도가 있었다. 면담록 업무일지 비망록 같은 문서들을 퇴임때 상도동 사저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의전실 관계자는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전임 대통령의 업무에 관한 문건은 거의 남아있는게 없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면담록이라면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위해 여러 인사들과 만나 나눈 얘기를 통치사료 비서관이 배석해 녹음하듯 기록한 공문서다. 사저로 가져갔다니 그 문서들을 사유물로 취급했다는 얘기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부르짖던 사람의 역사의식이 그렇다니 못믿을 일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공문서 반출이 관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임자들도 모두 자신의 업무에 관한 공문서를 가지고 나갔다는 말인가. 통치사료 비서관이 작성한 공문서를 다 가져갔다면 우리현대사의 공식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왕의 재임중에 작성된 사초는 물론, 선왕에 관한 기록열람까지도 금했던 것은 사초의 변질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역사의식을 계승하지는 못해도 통치기록을 사유물로 여기다니 조상들에게 이보다 부끄러울 일이 있을까. 역사는 책갈피 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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