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안정법’싸고 全 정권과 알력/美우려 입장 전달위한 다방면 청와대 접촉노력 거부당해/85년 광복절에 “자유·인권존중이 우리목표” 기념사 발표/한국민들 “민주주의 수호자” 찬사불구 당국과는 서먹서먹85년 8월초 한국 신문들은 집권여당이 발의한 「학원안정법」을 정부가 (국무회의에) 제출할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우리 대사관과 몇몇 한국친구들은 이 법안이 2개월이상의 작업끝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생시위와 대학 캠퍼스의 난맥상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이후 줄곧 전정권을 괴롭혀 온 문제였다. 이 문제는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이후 전대통령이 특히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85년 5월 대학생들의 미 대사관 공보원 도서관 점거사건은 청와대로 하여금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한 계기가 됐다.
전대통령은 학생운동에 관한한 미국민과 미 대사관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대통령은 많은 한국학생들이 북한의 선전선동을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관점에서는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몇몇 급진적 지도자를 데려다 「재교육 캠프」(註 녹화사업;강제징집)에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 공산주의자가 과거에 그랬고, 또 지금도 계속해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 문제는 몇몇 동맹국들의 마음속에 인권에 대한 깊은 회한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진정 한국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많은 사안에 대해 서로 의견 차이를 느끼고 이에 대해 피차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또 나는 미 대사가 한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하고 있다고 비쳐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미 동맹관계의 기본틀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의 걱정과 불만은 6월말에서 7월초 청와대에 전달됐다. 그러나 아무 답변이 없었다. 당시 우리 대사관 보고서는 미 워싱턴의 주목을 끌었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한국의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나볼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슐츠장관은 대단히 분노하면서, 미 대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긴급현안에 대해서는 미 대사는 한국의 대통령을 언제나 만날수 있었다.
나는 윌리엄 리브시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을 통해 나의 메시지를 전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리브시 장군은 자신의 참모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와대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몇몇 한국군 장교들은 그 문제의 민감함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생들에게 어느정도 특별한 훈련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외무부를 통해 몇차례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외무부 직원중 한사람은 지나치게 미국의 입장을 두둔한다며 청와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이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는 심지어 정보망을 동원, 국가안전기획부를 통해 청와대와 접촉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외무부는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전면적인 공세를 펴고 있고, 워싱턴으로부터 우려의 뜻을 전달받은 것으로 청와대와 전대통령이 인식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한국언론은 통제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아일보의 편집진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독립적 전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8월8일 목요일 「좌익」 학생들이 격리돼 재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한국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을 때, 우리는 정말 진퇴양난에 빠졌다. 미국에 있는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은 전정권과 그의 통치스타일을 반대해 왔는데, 우리 동맹국을 공격하기 위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85년 8월10일 토요일, 대사관 직원들이 낮12시에 모두 퇴근한 뒤 나는 온종일 사무실에서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미국의 두 의회대표단이 오기로 돼있어서, 그들이 서울에 있는 동안은 이 민감한 문제를 다룰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제날짜변경선과 관련된 많은 일을 해오면서 한가지 착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의 대일(對日)전승기념일은 8월14일이고, 한국이 일제에서 해방된 광복절은 8월15일이었다. 14일자 신문에 실리게 하기위해 나는 10일 오후까지 「워커 미 대사의 대일전승기념일 40주년 기념사」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미대사관 공보원(USIS) 직원들에게 전화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참여해 번역작업에 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민으로부터 자신의 국내문제에 대한 간섭이라는 오해를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청와대가 인권을 향한 미국의 강한 의지에 대해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14일자에 인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광복절 기념행사에 아무런 훼방요인이 되지 않았다. 동아일보 관계자는 그들이 나의 이런 입장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신문사에도 전화해 그날 인쇄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언론이 갖고 있는 경쟁적 습성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것이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아일보와 다른 신문사들은 이 기념사를 내보냈다. 몇몇 신문은 이번이 미 대사가 양국 국민에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에 대해 적절히 성명서를 내는 첫번째 사례라고 언급했다. 또 그것이 추가로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음이 틀림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내가 82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을때 나의 짧은 연설의 근저에는 토머스 제퍼슨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성(理性)의 창조적인 사상은 민간통치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전대통령은 조용히 자신의 계획을 버리고, 광복절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렸다. 과거 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일부 인사를 포함한 한국민들은 거기에는 서울의 지도급 유수 연구기관의 존경받는 교수들도 포함돼 있었는데 나에게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며 화답했다. 이들중에는 후에 김영삼(金泳三) 정권하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냈던 이홍구(李洪九) 교수도 있었다. 「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주된 문구는 영어와 한국어로 인쇄됐고, 한국의 많은 사무실에 내걸렸다. 토요일 오후는 이런 일을 하면서 기분좋게 지나갔다.
85년 대일전승기념일에 대한 나의 기념사 몇몇 문구는 며칠 안돼 미 대사관을 포함한 많은 장소에 한국어와 영어로 내걸렸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자유에 대한 가치,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인권존중을 향한 미국의 신념과 헌신적인 노력에 대해 누구도 의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같은 가치를 추구하는데 본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전세계 동맹국들과 협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지적·종교적 자유는 적법한 통치를 위한 토대가 돼야 한다고 미국은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효율적이고 단합된 마음으로 전제(專制)정권과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스런 지성의 힘을 우리는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박받지 않는 이성으로부터만이 경제·과학·문화적 진보를 가장 풍성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간의 의사(意思)는 민간통치의 규칙에 대한 적법한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첨가해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학술기관, 기업 사무실, 심지어는 공장에까지 이같은 기념사가 걸려있는 것을 보면 내용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 3주후 그 모든 것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나는 한국의 당국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로부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서울을 떠난뒤 몇년후 한국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한 친구는 나에게 『처음부터 외국으로부터 나온 어떤 징후나 생각은 국내 정보기관을 통해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다고 말했다.<워커 전 주한미대사> <번역=황유석 기자>번역=황유석>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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