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시간인식 오류’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된다. 은행예금이 통째로 사라지고 갑자기 미사일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국내 프로그램 수정비용은 8,230억… 남은시간은 604일 뿐이다.2000년 ○월○일.
「그날」이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난방도 안되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다. 춥고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담요와 라면을 사기 위해 아파트 10층을 걸어 내려간 다음 한참 떨어진 슈퍼마켓까지 걸어갔다 왔다. 엘리베이터 작동이 중단됐고 자동차도 시동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아파트에서는 얼마전 엘리베이터가 서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꼼짝없이 갇혀 있기도 했다. 회사는 버스를 타고 간신히 출근하지만 전산망이 고장나 자리만 지키다 돌아온다. 집사람이 독감에 걸린 작은 아이를 업고 병원에 갔더니 의료보험 기록이 없어져 애를 먹었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가보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러차례 통화를 시도해봤지만 계속 먹통이다.
더욱 큰 일은 돈이다. 월급날이 다 되어 가지만 회사에서는 전산자료가 엉망이 되는 바람에 제 때에 줄 수 없다고 한다. 현금카드도 신용카드도 무용지물이 됐고 몇년 동안 모아둔 적금과 주식은 통째로 없어져 버렸다. 지방 도시 어딘가에는 갑자기 날아온 미사일로 온통 불바다가 됐다고 하고 핵 발전소 인근 도시가 방사능에 노출됐다는 소문도 들린다. 불안하다. 차라리 옆부서 김대리처럼 지난해말 일찌감치 가족들과 함께 오지로 떠났어야 하는 건데. 마치 몇 십년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정말 지구의 종말이 가까와 온 것은 아닐까.
먼 미래를 그린 SF 영화의 모놀로그가 아니다. 지금부터 2년 뒤 어느 누군가의 일기가 될 수도 있는 실제 상황이다. 만일 우리가 밀레니엄 버그와의 싸움에서 완패한다면.
밀레니엄 버그.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뭔가 복잡한, 하지만 나와는 별 관련 없는 컴퓨터의 문제쯤으로만 알고 있다. 기껏해야 돌아가신 1900년생 할아버지가 서류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되고 2000년생 아기가 100살로 호적에 올라가는 「가벼운」오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밀레니엄 버그가 가져올 재앙은 상상을 초월한다. 컴퓨터 칩이 내장된 기기들은 대부분 그 칩에 시간인식 기능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각 칩들의 시간인식에 혼란이 오면 기기의 작동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 주변에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가능한 일이 얼마나 있는지. 작게는 은행거래부터 크게는 생산라인과 미사일등 무기체제, 인공위성까지 모두 컴퓨터로 움직인다.
각각의 컴퓨터는 기관, 기업, 나라 등을 단위로 무수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중 하나만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하지 못해도 망 전체가 엉망이 될 수 있다. 한국전산원 2000년문제종합지원센터 선우종성 실장은 『밀레니엄 버그야말로 2000년을 코앞에 둔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경고한다. 인간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컴퓨터가 이제는 거꾸로 인간의 생존기반을 뒤흔들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밀레니엄 버그와의 싸움은 이미 한창이다. 미국은 93년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 95년부터 각 주와 민간기업들이 구체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유럽에서는 영국이 가장 먼저 액션 2000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공공부문에만 30억 파운드(7조5,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했으며 2만여명의 프로그래머를 육성중이다. 캐나다는 밀레니엄 버그 퇴치를 위해 정부예산 14억4,000만 달러를 책정했다. 일본 역시 96년 우정성 산하 정보서비스협회에 대응위원회를 구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승패 여부는 돈과 시간에 달려있다. 미국의 조사기관 가트너는 밀레니엄 버그 문제해결에 전세계적으로 6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 들어간 돈 보다 1000억 달러가 많은 액수이다. 피치 IBCA사의 추산은 최고 1조5,000억 달러에 달한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미국 내에서조차 2000년까지 자국내 모든 시스템을 손볼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의 경우도 상황은 만만치 않다. 국내에서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문제는 지난해말에야 뒤늦게 제기됐다. 당시 한국정보산업연합회가 국내 공공기관과 기업체 15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0년 문제를 해결한 곳은 삼성항공 LG화학 주택은행 등12%에 불과했다. 58%는 착수조차 못한 상태였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됐다. 이 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제적 신용평가기관들은 이미 밀레니엄 버그의 해결 여부를 묻는 설문지와 실사단을 보내오고 있다. 미국연방은행도 『2000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나라와는 거래하기 힘들것』이라고 선언했다. 삼성SDS의 Y2K 솔루션 센터 송하장 대리는 『밀레니엄 버그를 퇴치하지 않는다면 또한번의 대외신인도 추락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매달릴 곳은 결국 정부 뿐이다. 정보통신부가 추산한 국내 밀레니엄 퇴치 비용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고치는데만 8,230억원. 상암 월드컵 주경기장을 두개 짓고도 남는 비용이다. 그러나 올해 배정된 정부예산은 57억6,800만원에다 추경예산을 합해 120억원에 불과하다. 관계자들은 『한시가 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2000년까지는 불과 604일 밖에 남지 않았다.<김지영 기자>김지영>
◎밀레니엄 버그 Q&A
●밀레니엄 버그란?
「천년」을 뜻하는 밀레니엄(Millenium)과 원래 「벌레」라는 뜻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상의 오류를 가리키는 버그(Bug)의 합성어. 연도표시를 마지막 무자리로 표기하고 있는 컴퓨터가 2000년 1월1일을 기점으로 2000년대와 1900년대를 구분하지 못해 발생하는 각종 혼란을 말한다.
●왜 생겨났나?
대형 컴퓨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60년말∼70년대초 프로그래머들이 컴퓨터의 기억용량과 비용을 절감하고 프로그램을 손쉽게 만들기 위해 연도를 두자리로 표기한데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날짜가 들어간 모든 프로그램과 데이타 파일을 일일이 검색,두자리 연도 표시를 네자리로 바꾸어준뒤 새 소프트웨어 운영, 다른 네트워크와의 연계 등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철저하게 테스트하는 수 밖에 없다.
●어느정도 복잡한 작업인가.
100만 스템(연산처리 과정)프로그램이 들어가는 공공기관 컴퓨터의 경우 10명의 전문가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린다. 은행 컴퓨터는 보통 1,000만 스텝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프로그래머들이 수작업을 하거나 전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양쪽 모두 막대한 인력,시간,비용이 든다.
●Y2K 문제란?
밀레니엄 버그의 별칭. Y는 연도(Year),K는 1000단위(Kilo)에서 따온 것으로 「2000년 문제」를 뜻한다.
●99 패킷이란?
밀레니엄 버그의 전조로 여겨지는 상황. 일부 기업체나 금융기관들이 연도표시 제한을 9999로 막아놓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어 99년 9월9월 이후 각종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코볼(COBOL)이란?
60∼70년대 대형 컴퓨터에서 90% 이상 사용되던 컴퓨터 언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밀레니엄 버그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중대형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코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40∼50대의 중년 코볼 전문가들이 새삼 각광받고 있다.
●모든 컴퓨터가 예외없이 해당되는가?
90년대 이후 보급된 신형 메인 프레임은 연도표시가 네자리수로 되어있어 문제가 없다. PC의 경우 펜티엄급(586) 이상은 안전하다. 단 386급이나 오래된 조립부품을 사용한 경우는 업체에 문의해 문제 여부를 확인, 예방조치를 해두는 것이 좋다.
●직접 영향 받을 수 있는 기기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휴대폰,삐삐,자동차,비디오카메라,전자레인지,엘리베이터,팩시밀리,CC TV,에어컨,사진기,전자시계,전원스위치시스템,은행ATM 단말기,우편요금시스템,은행금고,의료장비,화재감지시스템,공학용계산기,항해시스템 등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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