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社 주최 제16회 여성생활수기 공모에는 총 80편이 응모했다. 어느 해보다 응모작이 많았던 올해 어떤 작품이 들어와 무슨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지 우수작 수상자 2명과 심사소감, 응모작 경향을 소개한다. 최우수작과 우수작등 당선작 3편은 7일자에 게재된다.◎응모작 경향/실직소재 작품 부쩍늘어
지난 해보다 20여편이나 많은 올해 응모작품 중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가난과 시집살이, 남편의 외도, 폭력등을 이겨낸 이야기들로 예년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IMF 영향인지 남편, 아버지의 실직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 석달전 실직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을 그린 「나의 가족(박신지)」, 한달전 해고된 남편이 이제 제빵사 공부를 시작한다는 「겨울 지나면 봄(신연)」등 6편이나 됐다.
남편이나 시부모,자녀의 간병기도 많았다. 척추장애인 남편의 재활기 「마르지 않는 행복의 샘(박미자)」, 9년전 뇌경색증으로 쓰러진 남편을 보낸 아내의 마음을 그린 「세월(윤영순)」등 10여편이었다. 정신대에서 탈출한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며느리가 쓴 「가네타는 싫어요(김자성)」도 눈에 띄는 응모작이었다. 육아기나 남편과의 연애담등 밝은 이야기도 3편정도가 눈길을 끌었다. 밝고 어두운 차이는 있었지만 여성의 의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만은 어느 수기에서나 읽을 수 있었다.<노향란 기자>노향란>
◎우수작 ‘엄마가 된다는 건’ 최은영씨/“엄마가 되니 참인간이 된듯”/보람과 기쁨담긴 육아일기 소개/“생명의 소중함 깨닫는 순간 이기심·사회진출 강박감 사라져”
『엄마가 된다는 건 비로소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이라는 글로 우수작 당선자가 된 최은영(30·서울 강남구 역삼동 836 한스빌아파트 101동 417호)씨는 수상작 제목에 대해 이렇게 풀이한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고 이기적 심성과 사회진출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릴 수 있었다. 성격도 밝아지고 겸손과 기다림, 너그러움이라는 삶의 덕목도 조금은 깨닫게 됐다』
수상작은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12가지를 정리한 일종의 육아일기. 결혼한 지 3년만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겪은 자잘한 경험과 생각, 차츰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등을 솔직하게 기록했다. 이 작품은 수십건의 이야기를 묶어 친구들에게 돌려보게 했던 일기집 중에서 선별한 것이다. 그는 『결혼한 친구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위해 일기를 공개했는데 의외로 도움이 됐고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에 힘을 얻어 몇편을 골라 응모했다』고 말했다.
그의 일기는 제왕절개 수술후 아이를 보며 어색했던 느낌, 산후우울증으로 이유없이 남편이 미워지던 일, 옹색한 원룸아파트(17평)에 살면서 손님을 맞을 때마다 벌어지는 간이청소,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러 갔다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되돌아왔던 경험 등 지극히 평범한 얘기다. 하지만 그 뒤에는 사회에 대한 도전과 포기를 거듭하다 결국 가정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아가는 지혜가 담겨있다.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와 동대학원을 나온 최씨의 꿈은 언론관련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92년 결혼 후에는 사회와 단절되지 않으려고 남편이 일하는 리크루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사회로 뛰쳐나갈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또 친정어머니까지 병환으로 눕자 그 꿈을 접었다. 그때부터 육아일기와 함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집안에서 자기 세계를 정리하고 사회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아이가 어느 정도(32개월) 자라서 최씨에게는 다시 한번 사회에 대한 도전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출판사를 차려 자신의 소설과 아이들을 위한 책을 펴내는 것. 그러나 집착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테두리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고 또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정일과 사회일은 선택과 조화의 문제인 것 같다. 여건과 능력에 따라 양쪽 끈을 조정하면서 일을 찾아낸다면 결과 이전에 그 자체가 보람일 것이다』<최진환 기자>최진환>
◎우수작 ‘내일은 맑음’ 이점순씨/“결혼 13년간 열여덟번 이사”/방랑벽 남편과 무일푼 결혼생활/고물장사·포장마차 등 억척인생/“IMF 3년간 속옷한벌 안사겠다”
『결혼생활 13년에 열 여덟번 이사, 쉽지 않은 삶이었지요』 우수작으로 당선된 이점순(36·전남 순천시 용당동 현대아파트 109동 601호)씨는 『이렇게 살아 숨쉬기까지 지켜봐 주신 많은 분들의 무언의 격려와 바람에 대한 보답을 하기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13년전 쌍둥이중의 동생인 남편과 형제 합동결혼식을 올린 이씨는 생활밑천을 마련한다고 신혼여행도 못가고 흔한 금반지 하나 교환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시부모님은 『네 남편은 건달로 지내면서 형 몇배의 돈을 썼고 재산의 3분의 1을 축냈으니 살림밑천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쌀 한 가마니와 연탄 20장만 가지고 대책없이 분가했다. 일거리를 찾던 중 남편이 배달일을 해보겠다고 해 돈을 긁어모아 오토바이 한 대를 사줬으나 적성에 맞지 않다며 집어치웠다.
궁리끝에 1톤 봉고트럭을 어렵게 장만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남편과 함께 계란장사부터 시작해 소금장사, 고물장사등 닥치는대로 장사를 했다. 덕분에 돈이 조금 모아지자 남편의 방랑벽이 또 발동, 친구와 동업한다며 돈을 날려버렸다. 이씨는 홀몸이 아닌 상태로 다시 거리로 나섰고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출산후에는 아이를 들쳐업고 파출부와 우유배달을 해가며 살림을 꾸려갔다. 이 어려움 속에서 억척스럽게 일어선 경험을 이씨는 수기에 털어놓았다.
『정말 힘들 때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참아냈다』는 이씨는 『내가 겪은 어려움을 내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가난한 농가의 1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씨는 세살 터울인 오빠가 걱정없이 학교에 다니도록 중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중학 졸업 2년만인 81년에 고등학교 과정인 성경고등학교(지금의 성서신학원)에 들어갔다. 집에서는 「쌀 한됫박 보태줄 여유」가 없어 친구 자취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신문배달로 학비를 벌었다. 『아마 순천 최초의 여자 신문배달원이었을 것』이라는 이씨는 그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과 중1인 아들, 딸에게 『공부를 할 수 있을 때 많이 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씨 역시 지금도 순천대 야간대학에서 문예창작 과정을 듣고 있다.
이제 남편은 트레일러 기사로 마음을 잡았다지만 일거리가 일정치 않다. 이씨는 「3년 동안은 속옷 한벌 사지 않는다」는 각오로 IMF를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순천=양준호 기자>순천=양준호>
◎심사평/인생 험한고개 넘고 넘은 이야기 ‘뭉클’
파란에 찬 회고담과 어머니에 대한 회상기, IMF 체제하의 역경 극복기, 정신대와 6·25 등 역사적 사건 체험담…. 원고들을 다 읽고 보니 대략 4가지 주제로 압축됐다. 주제만 들어도 고달픔이 물씬 풍겨나는 이들에 비해 간간이 끼여 있는 이민생활 체험기와 직장 체험기는 상대적으로 경쾌하게 읽혔다고 할까. 그러나 역시 마음이 놓이는 쪽은 험난한 고개를 넘고 넘어간 이야기였다. 악조건에 대항하는 정신적 자세와 그 극복 과정에 우리의 관심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이없이 잇몸으로 만들어가는 행복(김미순)」은 최종 열 편에 들었던 「젊은 날의 간이역(권채연)」과 함께 무욕한 삶을 통해 만나는 행복의 모습을 잔잔히 펼치고 있다. 「젊은 날의 간이역」에 비하면 오히려 거친 솜씨이지만, 이것이 과연 남편이 말하는 무욕한 삶의 자유인가를 자신에게 거듭 물어가면서 차츰차츰 물질없이 살아가는 행복을 깨쳐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능하다면,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 집을 짓고 최소한의 물질로 생활했던 미국의 사상가 헨리 소로가 당시의 타락한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대안이 되었던 것처럼, 이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즈음 우리의 궁핍한 삶에 참신한 대안이 되길 바라는 욕심도 감히 품어본다.
「내일은 맑음(이점순)」은 대개의 고생담이 무능한 남편의 도움을 애초에 포기한채 혼자만의 희생으로 일관하는 것과 달리, 부모에게서까지 무위도식자로 낙인 찍힌 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켜 일으키고 거듭 기회를 마련해 함께 발돋움해나간 의지를 높이 샀다. 그 의지는, 응모 당시 또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열여덟번째 셋방 이사를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는 마음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의 인생에 어떤 병균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항체가 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엄마가 된다는 건(최은영)」은 모처럼 밝고 발랄한 내용으로 시선을 끌었으나 너무 세련된 글솜씨와 지나치게 능란한 입담 때문에 오히려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육아의 어려움을 다각도로 짚어나간 마음의 눈썰미, 혼돈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 이 시대 젊은 주부들의 삶을 잘 그려내었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윤영순(전북 완주)씨의 「세월」 이혜순(미국 뉴욕 브루클린)씨의 「아름다운 사람들」 장옥순(광주 북구)씨의 「아버지의 손」 백순(경기 안양)씨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도 오래 눈길을 끌었던 작품임을 덧붙인다.<심사위원=윤영수·이상희>심사위원=윤영수·이상희>
◎안타까운 낙선/못된 오빠에 사는곳 알려질까 수상후보 포기
최종심에 오른 작품 5편중에는 인적 사항이 노출될까봐 후보작에서 중도사퇴한 사례가 있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오히려 굴레인 여성들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굴레에 관하여」로 응모한 조모(32·부산)씨는 3대에 걸친 장애와 오빠의 파락호(破落戶)같은 행동으로 고생한 경험을 진솔하게 써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조막손을 가진 아버지에 이어 언니도 조막손, 자신은 언청이였고 언니의 딸까지 정신지체장애인이었다.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언니는 남의 집살이로 생계를 도왔으나 오빠는 걸핏하면 여동생들의 돈을 뺏어갔다. 결혼에 실패한 언니가 위암에 걸려 장애인조카를 미혼인 자신이 돌보겠다는 결의를 보이는 애틋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실 확인과정에서 조씨는 『오빠의 손길을 피해 숨어 사는데 다시 괴롭힐까봐 두렵다』며 『인적사항이 노출된다면 수상자 후보에서 사퇴하겠다』고까지 밝혔다. 응모 이유에 대해 조씨는 『뽑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를 단지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었다』며 『털어놓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라고 말해 수작으로 평가했던 심사위원들을 안타깝게 했다.<노향란 기자>노향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