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통’ 레이건 숙소 상자반입 “경악”/訪韓 며칠전부터 내아내도 출입제지할 정도로 완벽 통제/“한국의 국보” 꽃꽂이전문가 任씨 陶器선물갖고 무사통과/보안요원들도 名士로 존경받는 중년부인 거절못한듯음악, 미술등 문화 각 분야에서 많은 재능있는 지도자가 있는 한국은 내 아내와 내가 한국풍의 아름다운 미 대사관저에서 머무는 동안 많은 풍요로움을 선사했다.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건축가이며 전통미술, 고대종교에도 식견을 갖고 있던 조재용씨는 필립 하비브 전 대사가 아름다운 대사관저를 설계하기 위해 뽑은 사람이었는데, 우리의 매우 빈번한 방문객이었다. 우리는 항상 그의 감칠맛나는 유머와 철학적 사색을 즐겼다. 한국의 유명한 소프라노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상을 받기도 한 김영미(金英美)씨는 이탈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받은 재능이 많은 성악가였는데, 생기발랄하고 온화한 그녀의 성품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잘 어울렸다. 그녀가 우리 관저에 왔을 때, 우리는 방문객들이 한국인의 재능을 감상할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줄 것을 종종 부탁했다. 꽃꽂이 전문가인 임화공(任華公)씨는 문화적, 예술적으로 탁월한 지도자였다. 우리는 그녀를 종종 만났다. 몇몇 우리 친구들은 그녀의 꽃꽂이 학원에 다니거나, 꽃꽂이 학회 모임에 나가곤 했다. 그녀는 미국민을 비롯한 세계각지의 많은 사람들처럼 한국민도 언론과 스포츠, 예술성이 뛰어난 인물들에 대해 가끔 매우 특별한 관심과 자유스러움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매우 유쾌한 통찰력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임선생은 예도(藝道)와 아름다운 정원이 전통적으로 물려내려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본 꽃꽂이 「이케바나」(生花)의 대가(大家)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러면서 한국 꽃꽂이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놀라운 솜씨로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실현시켜 나갔다.
임선생은 꽃꽂이에 대한 많은 책을 출간했다. 그녀는 이 예술이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 그녀가 글에서 밝힌대로 꽃꽂이 설계는 감정이입과, 사람 및 문화간 이해를 촉발하는 과정에서 조화와 존경, 부동(不動), 고요함의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고요한 특사(特使)」인 꽃은 그 색채와 함께 싹이 트면서 만개(滿開)할 때까지의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정심(平靜心)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사실, 그녀의 몇몇 친구들은 임선생과 그 예술적 감정이 일본과 한국의 긴장관계를 완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게 되기를 바랐다. 삽화를 곁들여 아름답게 꾸민 그녀의 책들은 일본에서 처음 출간됐다. 그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동아시아에 와서 꽃꽂이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랐다. 나 스스로는 그다지 별다르게 이 특별한 예술형태에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내 아내는 임선생이나 그 제자들이 전시회나 전람회보통 조선호텔에서 열렸는데를 개최할 때면 언제나 내가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흥미롭게도 임선생은 처음 우리 미 대사관 공보원(USIS)과 함께 일을 하면서 발판을 다졌다. 그녀의 첫 대규모 꽃꽂이 전시회는 58년 USIS 건물에서 열렸다. 그 전시회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그녀는 감수성이 예민한 모든 종류의 독특한 꽃들도 한국의 추운 기후에서 성장할수 있도록 만든 자신의 식물원을 가꿀수 있었다. 임선생은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를 구울수 있는 자신의 가마를 갖고 있었고, 그 도자기에 꽃을 심었다.
임선생의 첫 전시회가 열린지 25년이 지난 83년, 그녀는 한국사람이 흔히 말하는 「국보」(國寶)같은 존재로 부각됐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누구나 그녀를 인정했다. 그녀는 한국 TV 에 출연, 꽃꽂이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또 강의를 하곤 했다. 임선생은 우리가 한국문화의 업적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또 천재나 거장(巨匠)과 교우할때 느낄수 있는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녀의 몇몇 동료 한국인들은 그녀가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자신이 대단한 결단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몇몇 제자가 꽃꽂이에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려고 하면, 그녀는 우리 관저로 전화해서 『내일 오후 4시 조선호텔에서 꽃꽂이 전시회가 있으니 꼭 와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나서 다음날 3시쯤 내 아내 세니와 내가 함께 올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전화를 했다. 외교가의 몇몇 부인들, 특히 기젤라 에거라는 독일대사 부인은 임선생의 꽃꽂이 수업에 참여해서는 그녀가 오히려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정말 마음 따뜻하고 열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꽃꽂이의 엄격한 규율을 강조할 때면 그녀는 매우 강인하고 일관된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결단력과 강한 의지는 오히려 우리 관저에 이상한 일을 낳게 한 원인이 됐다.
83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의 한국 국빈방문 일주일전, 한국정부와 미정부의 보안요원들은 덕수궁뒤에 있는 우리 관저 바로 옆도로를 통제했다. 그들은 긴 못이 박혀있는 차단막을 설치했다. 우리 관저로 들어오려면 그 차단막을 반드시 뚫고 지나와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약 3일동안은 보안요원들의 철저한 검색과 경비가 행해졌다. 사실, 내 아내도 몇차례 제지당했다. 자신의 임무가 매우 단호한 엄격함을 요구하고, 또 모든 사람을 감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몇몇 요원들은 내 아내가 자신의 관저에 들어가는 것까지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민들은 잘 몰랐겠지만, 극소수 보안간부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여사가 매우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1년 미국에서는 레이건 대통령 암살기도사건이 있었다. 그보다 두달앞서 대한항공 007편 피격추락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최고조로 달해 있을 때였다. 미 보안요원들은 최상의 보안을 요구했고, 따라서 미 대통령이 호텔에 묵기보다는 워커 대사 부부로부터 대사관저를 접수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조선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대부분의 한국언론과 일반대중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이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묵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관저에 머물기로 돼있는 레이건 대통령부부와 참모진들이 도착하기 하루전, 아내 세니와 나는 관저를 떠나 조선호텔 후문으로 갔다. 그래서 누구도 우리가 관저밖으로 옮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가 떠날때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매력적인 꽃꽂이 예술가 임선생이었다. 임선생은 특별히 자신이 만든 도기(陶器) 몇개를 레이건 대통령부부를 위해 만들었다며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갖고 대사관저로 오기를 원했다. 그것들은 모두 상자안에 포장돼 공식 선물용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임선생님, 불행히도 당신은 관저로 들어오실수없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방문기간중에는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물은 반드시 보안검색기기를 통과해 광화문근처에 있는 미 대사 사무실의 1등 서기관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아내 세니는 임선생이 이같은 보안상황을 이해해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는 우리 관저 집사였던 권수호(權守浩)씨에게 임선생에게 한국말로 선물을 관저안으로 절대로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도록 했다. 보안요원들은 그녀가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녀는 상자를 사무실 또는 1등서기관에게 전달해야 했을 터였다.
아내와 나는 관저를 떠나 조선호텔로 이주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국빈방문기간중 필요한 정장을 정리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권집사였다. 그는 『임선생님께서 레이건 대통령부부에게 선물할 두개의 큰 상자를 갖고 지금 관저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순간 경악했다.
삼엄한 경비를 하는 이유는 어떠한 테러공격도 사전에 방지하자는데 있다. 소포나 상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관저안으로 반입될수 없었다. 차단막을 설치한 한국의 보안요원들은 임선생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통령부부가 도착하기 전 두개의 커다란 선물상자를 갖고 관저안에 있었다.
이같은 보안허점이 발생한데 대해 몇가지 추론이 가능했다. 어떤 면에서는 놀라운 것이지만, 재미있는 것이기도 했다. 첫째로 한국민들은 자신의 임무나 직위가 어떠하든간에, 또 차단막을 설치한 보안요원들이 얼마나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든지간에 매우 위엄있는 목소리와 양반 어투로 말하는 그 유명하고, 존경받는 중년의 부인을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국보」로, TV명사(名士)로 존경받는 그녀는 결코 거절당할수 없었다. 요원들도 그렇게 할수 없었을 것이었다. 둘째로 그녀의 순진무구한 몸자세가 때때로 보안요원들을 설복시킬수 있었을 것이었다. 임선생은 그런 자태를 소유하고 있었다. 셋째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관련된 경우에는 매우 집요하다는 것을 지적할수 있다. 임선생은 자부심이 무척 강했고, 한국민들은 그녀의 특별한 가마에서 나온 도기를 매우 소중히 했다.
임선생은 우리에게는 결코 잊혀질수 없는 친구이다. 우리는 당시 그 사건을 레이건 대통령부부에게 말하지 않았다. 낸시 여사가 한국방문에 대해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또 우리는 방문에 대비해 모든 종류의 사전 보안 조치를 완벽하게 끝마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미국을 두번째 방문했던 85년 아내와 나는 워싱턴에서 이 이야기를 레이건 대통령부부에게 말했다. 그때 대통령 부부는 당시 받은 아름다운 도기선물에 대해 감탄하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당시의 여러 요인들을 이해하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번역=황유석 기자>번역=황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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