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교육은 조선시대처럼”/국가에서 사역원 운영/中·몽골·여진·日 4개 언어/회화위주 조기교육 실시/부산·평양에 分院설치도『오늘날의 외국어교육은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에서 배워야 합니다. 사역원에서는 아주 어릴 때 입학시켜 철저히 회화 위주로 가르쳤어요. 5세때 입학한 학생의 입교증이 남아 있습니다. 교재도 현지에 가서 교정을 받아오지 않으면 출판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외국어교육기관을 운영한 예는 당시 중국 일본은 물론 서양에도 없었습니다. 헌종때는 중인인 역관을 정2품에 제수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이 그만큼 외국어를 중시했다는 얘기지요』
고려대 국문과 정광(58) 교수는 「사역원 역학서(譯學書) 책판(冊板)연구」(고려대출판부·1만6,000원)를 통해 얻은 결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사역원은 고려말에 설치돼 1894년(갑오경장) 폐지될 때까지 620년 가까이 존속했다. 요즘 말로 하면 국립외국어대학쯤 된다. 부산과 평양에는 지방캠퍼스(분원)도 두었다. 『특히 영조때는 사역원에 특수어학실격인 「우어청(偶語廳)」을 설치했습니다. 여기 들어가면 외국어만 쓰고 우리말은 한 마디도 못 쓰게 했지요. 왕이 회화교육을 독려하고 교재제작을 손수 챙길 정도였습니다』
사역원은 중국·몽골·여진·일본어의 4개 학부로 돼 있었다. 일단 입학하면 「2·6고강(考講)」이라고 해서 매달 2일과 6일, 「원시(院試)」라고 해서 1년에 4번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당연히 출교(黜校).
『사역원은 회화·문자교재와 사전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중국어 회화교재 「노걸대(老乞大)」는 고려인 3명이 중국을 여행하며 겪는 이야기인데 거의 대화체입니다. 중국상인과 만나 수인사를 나누는데서 시작합니다. 이어 물건을 흥정하고 찻집에 들렀다가 도둑맞고 주인과 싸우고…. 요즘 알리앙스 프랑세즈나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쓰는 프랑스·독일어교재보다 훨씬 현실감있고 수준이 높지요. 시대별 언어변화에 맞춰 수시로 교정본을 냈습니다』
정교수가 조선시대 외국어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2년부터. 고려대박물관에서 옛 외국어교재(역학서) 원판(책판)을 발견, 해독하면서 본격 연구에 뛰어들었다. 「사역원…」은 그 연구의 결실이다.
『조선시대 외국어교육은 당시의 영어격인 중국어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언어에도 소홀하지 않았고 시대변화에 민감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주 방면 여진족이 청(淸)을 세우자 기존의 여진어 대신 그들이 쓰는 만주어로 교육내용을 바꿨지요』
문관 중에서도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세종대왕이 중국어를 좀 했고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 여진어도 꽤 했습니다. 선조때 영의정 이원익은 통역 없이 중국사신과 대화했으며 영조때 우의정 홍계희는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습니다. 실학자 홍대용도 중국어를 좀 했지요』<글 이광일 기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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