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경영·불공정관행 당장 철저히 혁파하고 부채·계열사감축은 점진시행”재벌개혁이 말만 무성한 가운데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재벌개혁이 혼선을 빚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재벌체제에 대한 평가가 간단하지 않은 데 있다. 재벌은 IMF체제를 불러들인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정경유착, 불공정 거래, 불투명 경영, 족벌 경영, 대마불사식 경영, 세습귀족 형성 등 그 해악이 이미 일반국민의 인내의 한계를 넘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재벌체제의 장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재벌체제는 기본적으로 후발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국을 따라잡는 기구로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이 아직 엄연한 개도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재벌체제의 유용성이 끝났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의 주종산업인 반도체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은 모두 세계적으로 소수의 기업이 지배하는 「전략적 무역」의 세계에 속한다. 그 세계에서 선진국 기업의 견제를 뚫고 상향 이동하는데는 재벌체제가 유리한 측면도 있다. 재벌의 무리한 투자가 국제적으로 「시장교란」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이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재벌체제에 장단점이 있는 만큼 그 개혁방안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없다. 영안실에서 조선소까지 하는 문어발식 확장이 과다한 것은 틀림없지만, 재벌을 해체하여 독립경영하는 것이 적당한지,「다섯 내지 여섯 개만 남겨두어서」 경영하는 것이 적정한지, 아니면 그 수가 더 많아도 좋은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재벌문제는 다른 개혁과제와 얽혀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 해법이 잘 나오지 않는다. 특히 재벌의 대마불사식 경영형태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금융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상 공황상태에 있는 금융을 통해 재벌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재벌개혁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범위를 좁게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부작용이 적고 국민적 합의를 모을 수있다. 불투명 경영과 불공정 거래관행 등은 당장 철저하게 혁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부채비율이나 계열사 감축등은 점진적으로 시행하여 산업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 부채비율을 내년말까지 200%내외로 내리라는 것과 같은 요구는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다. 기업수 감축도 공식적인 유인체계를 통하여 재벌 스스로 줄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개혁을 점진적으로 시행할 경우 과거처럼 시간이 감에 따라 재벌의 보이콧으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상호지급보증의 경우처럼 법제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시행을 강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재벌 개혁의 요체는 점진적이면서도 반드시 시행된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지시키는 것이다.
개혁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여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한 과제만을 점진적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재벌개혁은 처음부터 핵심적 과제를 빠뜨리고 있다. 재벌개혁의 과제중에서 경제에 주는 충격도 별로 없으면서 국민적 합의를 가장 잘 모을 수있는 것은 족벌경영과 세습귀족의 제거다.
전후 일본의 재벌개혁의 효과도 결국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저런 개혁방책을 내놓으면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금융실명제를 사실상 폐기함으로써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정부가 진정으로 재벌을 개혁하려면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개혁은 과제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모을 수 있고 부작용이 작은 쪽으로 집중하여 단호하게 시행한 것들이었다. 위기하에서 맞이한 개혁의 호기를 제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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