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병 계급장을 단 늙은 병사의 전역신고식 광경은 6·25의 비극이 아직도 진행중임을 보여주었다. 청년시절 헤어진 본처와, 북에서 재혼해 얻은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칠순의 국군포로 양순용(梁珣容)씨는 40년 이상 늦은 전역식을 가졌다. 몸은 늙었어도 경례는 힘이 있었다. 포로생활의 고통을 말해주듯 눈 하나는 찌그러졌고, 다리 한쪽도 불구였다.양씨는 식을 마친뒤 『송환을 기다리다 지쳐 정부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의 가슴을 향해 던진 비수같은 책임추궁이다. 북한땅에 아직도 많은 전쟁포로가 송환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부와 국민은 무엇하고 있었느냐는 피 맺힌 절규이기도 하다. 그가 증언한 생존포로 가족의 근황은 더욱 가슴 아프다. 전사통보를 받고 반백년이 되도록 수절한 전쟁미망인은 남편이 출정하던 날이면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왔다. 이웃집 처녀귀신과 영혼결혼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놀라운 사실은 양씨가 기억나는 대로 말한 동료 7명의 이름이 모두 전사자 명단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 억류돼 생지옥같은 세상을 살고있는 국군포로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증거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은 국군포로수를 6만5,000여명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러나 유엔군측 자료에는 8만8,000여명으로 돼있다. 이중 포로교환 당시 풀려난 사람은 8,333명에 불과했으니 적게는 5만6,600여명, 많게는 7만9,600여명이 억류됐다는 계산이다. 국방부는 93년부터 94년까지 이런 자료와 유족들의 신고 등을 근거로 실종자 명단을 정리해 2만2,562명 전사, 1만7,020명 실종, 2,372명 미확인으로 처리했다.
정부는 그동안 포로송환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94년 조창호소위 귀환을 계기로 실종자송환촉구대책위원회를 설치했지만 대북교섭이나 국제기구를 통해 송환을 요구한 일이 없다. 집권당도 말로는 송환교섭을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진 정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싸우다 포로가 된 그 많은 국민의 송환에 이토록 무관심했던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 없다.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와 지체없는 송환은 제네바협약에 규정된 의무다. 미국은 전사자 유골이라도 찾아가려고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북한과 끈질기게 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도 그간의 무관심을 반성해야한다. 양순용씨의 비극은 그와 가족 몇사람의 슬픔이 아니다. 적십자 재향군인회 같은 관련단체는 물론, 우리 모두가 생존포로 송환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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