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처럼 떨어진 하나회 ‘별 40개’/93년 5월13일 “12·12는 쿠데타적 사건”… 작전일지 등 은밀조사/5월24일 이필섭 합참의장 등 관련 고위장성 예편조치 단행/“정부가 軍매도” 합참회식·3사교장 연설사건 등 간헐적 반발1993년 5월8일, 제161회 임시국회가 열리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 토요일 오후인데다 8시간여나 회의가 계속된 탓인지 대부분의 의원들은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고 일부 의원들은 아예 의자 깊숙히 몸을 파묻은 채 졸고 있었다.
이때 재야출신 초선 민주당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단상에 올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12·12 사건에 대한 황인성(黃寅性) 총리의 답변이 애매해 다시 묻겠습니다. 12·12는 쿠데타였습니까, 합법적 군사행동이었습니까』
황총리가 다소 머뭇거리더니 단상에 올라 답변했다.
『그 사건은 당시 특수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일어난 하나의 군사적 행동으로 현재까지는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역사적 평가는 어떨지 모르나 불법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야당의석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고함이 빗발쳤다.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은 황총리의 이날 답변은 그러나 야당의 정치공세와 맞물리면서 문민정부 내내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96년 「역사 바로세우기」작업의 일환으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이 쇠고랑을 차게되는 정치적 단죄의 출발도 사실은 여기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즉각 황총리의 해임을 요구하고 「12·12 및 5·18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등 공세의 고삐를 곧추세웠다. YS의 공직자 사정과 개혁 드라이브에 국민여론이 절대적으로 호응, YS 지지율이 90% 이상을 상회하는 바람에 맥이 빠져있던 야당으로서는 모처럼의 호재였다.
5월13일. 이경재(李敬在) 당시 청와대대변인이 『12·12사태는 김영삼 대통령이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며 『황총리의 발언은 잘못된 것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공식발표했다.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
대통령이 사건의 성격을 이처럼 공식정리하자 야당의 공세는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12·12 당시 육참총장 정승화(鄭昇和)씨와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씨 등도 기자회견을 갖고 두 전직대통령 등 관련자의 의법처리와 현역에 건재한 관련 장성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대통령의 입장표명에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곳은 당연히 군쪽이었다. 권영해(權寧海) 국방 장관은 즉시 당시의 작전일지를 수집토록 하는 등 은밀하게 진상조사에 나섰다.
당시 국방부 S모국장의 증언. 『비록 하나회출신 일부 정치장교들의 일탈된 행동이긴 했지만 사실 군으로서는 12·12가 하극상이라는 청와대의 입장에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권장관은 이를 현직에 포진해 있는 노태우계열 장성들의 제거에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듯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청와대와 분주한 조율이 오간 후 마침내 5월23일 권장관이 청와대를 다녀왔죠. 다음날 하나회 숙정의 대미를 장식하는 12·12 및 5·18관련 장군들의 예편조치가 나왔습니다. 특히 4월15일 단행된 군단장과 사단장 인사에서 12·12 관련자 일부가 발탁되고 9·9 인맥 상당수가 군사령관직이 보장된 핵심 보직에 중용된 것이 문제됐던 시점이었지요. 군 일부에서 조차 「군개혁이 후퇴」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 여론이 제기되던 차여서 청와대로서는 숙정의 호기로 판단했을 겁니다. 전역 요구는 당시 김동진(金東鎭) 육참총장이 대상자들에게 전화로 통보했습니다』
5월24일, 정부는 이른바 「5·24 숙군」으로 불리는 군고위직 인사를 단행한다. 인사의 핵심은 「12·12 사태 관련 고위장성 예편」조치였다. 정부는 이날 현직 군최고서열인 이필섭(李弼燮·육사16기) 합참의장과 김진선(金鎭渲·육사19기) 2군사령관, 안병호(安秉浩·육사20기) 2군부사령관 및 박종규(朴琮圭·육사23기) 56사단장 등을 전역시키고 후임 합참의장에 공군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이양호(李養鎬) 공참총장을 임명했다.
노태우 군맥인 이른바 「9·9인맥」의 핵심인 이필섭씨는 12·12 당시 9사단29연대장을 맡고 있다가 노태우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연대병력을 끌고 중앙청까지 진출했다. 또 안병호씨는 당시 9사단 대대훈련통제장교로 있던 중 참모장의 지시를 받고 서울로 출동했다. 김진선씨는 당시 수경사 작전장교겸 상황실장을 맡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동태를 합수부쪽에 알려줌으로써 합수부측이 대세를 장악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박종규씨는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직에 있다 최세창(崔世昌) 여단장의 지시를 받고 부하 10여명과 함께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이로써 문민정부 출범이후 육군 고위층에 자리하고 있던 3성장군 이상 하나회원 전부와 소장급 일부가 옷을 벗었고 소장 이하도 모두 한직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취임 석달만에 옷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별만 무려 40개에 달했다. 그러면 하나회원들은 문민정부의 「토끼몰이식」숙정작업에 그저 추풍낙엽처럼 스러져만 갔을까?
하나회출신 예비역장성 C씨의 전언. 『문민정부 초기의 하나회에 대한 표적공세에 우리는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개혁바람이 워낙 거센데다 국민의 성원도 열화같아서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했지요. 우리들도 비록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형식이었지만 군이 정치에 개입한 과거의 일을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비(前非)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3성장군 이상은 명색이 장·차관급이므로 기본적인 예우는 갖추어서 전역토록 해야하는데 마치 동·반장 갈아치우듯 내모는 사태가 계속되자 속으로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군인은 명예를 먹고사는 직업입니다. 어느날 후배가 직속상관으로 오질 않나, 참모회의중인데 전화로 「오늘자로 전역식을 하고 집에가라」는 통보를 해오는 등 말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의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우리끼리 모이면 불만을 토로하기는 했으나 「집단반발 행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기무부대원들에게 완전히 파악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보가 차단된 무력(武力)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겁니다. 때문에 그중 혈기방장한 일부 멤버가 말로써 이의제기하는 「필마단기」식 반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은 흐름속에서 터져나온 게 93년7월 이충석(李忠錫·육사21기) 당시 합참 작전부장의 「합참 회식발언 사건」과 94년 10월 오형근(吳亨根·육사22기) 당시 3사교장의 「이임식 연설사건」등이었다.
하나회출신 두 장성의 반발요지는 「정부가 군을 매도하고 있는데도 수뇌부가 잠자코 있으며 일부 정치권도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건이 표면화하자 군내부의 의견은 「과거를 반성하고 석고대죄(席藁待罪)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적반하장격」이라는 평과 「모처럼 시원한 얘기를 잘했다」는 파로 갈렸다. 물론 전자가 대세를 이루는 분위기였지만. 그러나 문민정부는 이충석 장군의 돌출행동에 일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회원 집단반발의 전조(前兆)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민청와대 비서관출신의 현 한나라당 K의원의 증언.
『이소장의 회식발언에 청와대는 한때 당황했습니다. 또 이장군이 옷을 벗자 하나회 영관장교들이 구명운동을 위해 연판장을 돌린다는 첩보가 입수돼 기무부대가 진상파악에 나서는 등 초비상이 걸린 적도 있지요. 결국 사실무근으로 판명됐지만 상당히 살얼음판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문민정부 신실세들이 한때 아연 긴장하긴 했지만 이소장 등의 반발은 「하나회 척결」이라는 「도도한 역사의 강」에 던져진 조그만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문민정부 출범 1년동안의 군개혁은 기세등등했던 것이다.<윤승용·유성식 기자>윤승용·유성식>
◎합참 회식사건/이충석 작전부장 술잔 던져 보직해임 두달뒤 예편/李씨 “당시 소신 변함없다”
93년 7월9일 저녁, 서울 성동구 옥수동 대형갈비집 사파리가든(구 사파리클럽). 「5·24 숙군인사」로 합참의장직에 오른 이양호(李養鎬) 공군대장이 취임을 자축하기 위해 합참소속 소장급 이상 장성 20여명과 회식을 갖고 있었다. 주요 참석자는 편장원(片將圓) 합참1차장(육군대장), 김상준(金相駿) 작전기획본부장(〃중장), 서태석(徐泰錫) 북한정보부장(〃소장), 이충석(李忠錫) 작전부장(〃소장)등과 해·공군 장성들이었다.
이의장이 『그간 업무보고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자연스레 옆사람과 술잔을 권하되 돌리지는 맙시다』고 했다. 때문에 군고위장성들의 회식답지않게 「폭탄주」는 오가지 않고 갈비를 안주로 소주만 돌았다. 1시간반여가 지나 소주 10여병이 비워지면서 참석자들이 얼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헤드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소장급쪽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충석 부장이었다.
『새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군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겁니까. 군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군수뇌부도 문제가 많고…』 이때 옆에 있던 편장원차장이 말렸다. 이부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하다 주위에서 일제히 만류하자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술자리는 엉망이 돼 곧장 파해버렸다.
이부장은 육사21기 하나회 출신으로 수방사 30단장과 1공수여단장, 육본작전처장, 1사단장 등 요직을 거친 중견장성. 이부장은 동기생들의 권유로 다음날 이합참의장을 찾아가 취중행동을 사과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조용히 넘어갈 뻔했으나 참석자중 한명이 청와대에 며칠후 이를 직보하는 바람에 크게 불거졌다. 이부장은 일주일만인 16일 전격적으로 보직해임됐고 그해 9월 예편했다.
이충석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당시 군에 팽배해있던 문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아주 온건한 톤으로 제기했던 것』이라며 『지금도 당시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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