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 해임” 하나회 제거 칼빼다/93년 3월8일 권영해국방 청와대 조찬독대후 전격 발표/김진영 총장·서완수 기무사령관 경질 모른채 “신한국건설” 역설/YS,수석들과 오찬서 “깜짝 놀랐재?” 깜짝쇼人事 어록남겨문민정부 출범나팔이 울려 퍼진 지 불과 열하룻만인 93년 3월8일 오전 11시반. 서울 용산구 국방부청사 1층 기자실에 국방부대변인 박재욱(朴裁旭) 대령(현 육군정훈공보실장·준장)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마침 팀스피리트훈련 취재를 위해 대부분의 출입기자들이 포항 해병사단에 출장중이어서 평소와 달리 너댓명의 기자들만이 막 점심식사를 나가려던 참이었다.
박대변인은 『급히 발표할 게 있다』며 메모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늘자로 군수뇌부 인사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 김진영(金振永)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김동진(金東鎭)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또 서완수(徐完秀) 기무사령관을 해임하고 후임에 김도윤(金度閏) 기무사참모장을 각각 임명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전격 경질. 질풍노도와도 같은 YS의 「깜짝 군개혁」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발표하는 대변인도 흥분한 듯 말을 더듬었다. 기자들도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어 구내스피커를 통해 정오 라디오뉴스의 머릿기사로 군수뇌부경질 사실이 방송되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들던 현역 장성과 간부직원들도 모두들 『아니, 이게 어찌된거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후5시, 수뇌부 개편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는 기자들의 채근에 권영해(權寧海) 국방장관이 기자실에 내려와 1시간반여 동안 특유의 차분한 어투로 조목조목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과 육군참모총장 일정 등을 토대로 소위 「3·8 사태」로 불리는 당일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8일 오전7시. 권장관은 한남동 공관을 나서 청와대로 향했다. 장관취임후 처음 갖는 조찬독대였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무슨일로 조찬 독대를 하자는 걸까」 사실 권장관은 전날 저녁 경호실로부터 조찬연락을 받고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 완벽주의를 추구해온 업무스타일대로 밤새워 예상 질의 응답을 머릿속에서 굴려 보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문민정부 군개혁의 방향과 전략」. 권장관은 「군장성 인사기록카드 요약본」이 든 노란 봉투를 챙겼다. 청와대의 조찬식단은 소문대로 검박했다. 메뉴는 쑥국에 공기밥. 간단한 덕담이 오간 뒤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를 던졌다.
『장차관 인사도 끝냈으니 이제 군인사도 시작해야겠지요』(YS)
『군인사는 6월과 12월로 정례화돼 있고 수뇌부의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요』(권장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어야겠습니다』(YS)
『…』(권장관, 잠시 머뭇거림)
『육군총장을 국군통수권 행사차원에서 교체해야겠습니다. 후임은 서열대로 하면 됩니다. 해군과 공군총장 교체는 다음에 합니다. 기무부대는 내 선거공약대로 축소조정해야 합니다. 후임자는 기무업무를 잘아는 내부인사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YS)
너무도 놀란 권장관이 밥에는 손도 못댄 채 쑥국물만 홀짝이자 YS는 『입맛이 없는 모양이지요. 차나 한잔합시다』라며 티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총장후임에는 누가 적당합니까』(YS)
『기수별로 보면 육사17기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권장관)
3월8일 당시 군수뇌부는 이필섭(李弼燮·육사16기) 합참의장, 김진영육참총장(육사17기), 김동진(金東鎭·육사17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조남풍(趙南豊·육사18기)1 군사령관, 김연각(金淵珏·육사17기) 2군사령관, 구창회(具昌會·육사18기) 3군사령관, 김재창(金在昌·육사18기) 합참1차장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YS는 『아, 그래요. 그러면 김동진 장군이 총장을 하고 기무사령관은 김도윤 기무사참모장이 맡으면 되겠네』라고 하더니 즉석에서 메모지에 이같은 내용을 적고 서명한 다음 권장관에게 건네줬다. 문민정부의 새 군맥인 「김동진 총장김도윤 기무사령관」 체제가 수면위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권장관이 실무절차를 위해 국방부로 돌아온 시각은 오전 9시. 즉시 이중형(李重衡) 제1차관보와 전영진(全寧鎭) 인사국장을 불러 인사자료를 준비토록 지시했다. 청와대 발표때까지 극비보안을 지키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권장관은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인사결재서류에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고 오전 11시께 국방부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신임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임명사실을 통보하고 즉시 국방부로 들어오도록 지시했다. 김진영총장과 서완수사령관에게도 해임사실을 알려줬다. 이어 대변인을 불러 이같은 내용을 언론에 발표토록 지시했다.
그러면 당일 계룡대 육군본부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후임총장 인선작업을 벌이던 8일 오전8시. 김진영총장은 매월 첫째 월요일마다 육본연병장에서 열리는 국기게양식에서 강한 톤으로 『군도 신한국건설에 동참하자』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 이어 육본 대회의실에서 각군 사령부를 비롯한 육본 직할부대로부터 작전현황과 적정(敵情)보고를 받았다. 이때가 대충 오전9시께. 이미 청와대에서는 김총장의 경질이 결정난 뒤인데도 육본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월요 정례참모회의가 끝난 오전 11시20분. 참모들이 물러간 후 잠시 휴식을 취하던 김총장에게 비서실장이 『장관님의 전화』라며 전화기를 건네줬다. 간단한 통화를 마친 김총장은 「입을 악다문채」 비서실장을 불러 『총장이 바뀐다. 전역식과 이취임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때쯤 총장부속실에도 해임여부를 문의하는 전화가 잇달아 걸려오기 시작했다.
서완수기무사령관도 오전 11시30분께 전국 기무부대장 회의를 주재하다 회의실로 들어온 부관이 건네준 메모지를 보고서야 뒤늦게 자신의 경질사실을 알았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서사령관은 사무실로 돌아오며 참모들에게 『사령관이 바뀌는 정보하나 사전에 알지못하다니, 어느새 우리 기무사가 이꼴이 됐나』라고 혼잣말처럼 한탄했다. 그의 말은 「3·8사태」의 전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YS는 이날 오찬을 하며 수석비서관들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때, 모두 깜짝 놀랐재?』 두고두고 「깜짝쇼 인사」의 양념으로 인구에 회자된 말도 이때 나왔다.
그러면 이날 YS가 정말 즉흥적으로 수뇌부를 개편했을까. 대선전부터 현철씨를 통해 군관련 자문을 해준 것으로 알려진 예비역장성 A씨의 증언. 『YS는 사실 군부쪽 인맥이 거의 없었습니다. 때문에 현철씨가 가동중인 영관급장교단과 경남고출신 고위장성 일부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당선자 시절 인수위 보고과정에서 권영해 당시 국방차관으로부터 상당히 체계적이고 깊숙한 군정보를 접하고 권장관을 높이 보기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브리핑 권」이라는 별명처럼 권장관의 논리적인 언변에 여러번 「군에도 저런 인물이 있나」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 이미 「하나회 척결」에 대한 밑그림이 어느정도 완성됐을 것입니다. 이 작업에 당시 청와대 국방비서관이던 K장군이 상당히 기여한 것 같습니다』
「문민정부의 하나회 기습」. 훗날 「3·8사태」로 불리게된 YS의 군개혁작업은 이처럼 한편의 영화처럼 첫 막이 올랐다. YS는 이날을 시작으로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취임 1년여만에 숱한 「하나회 별」들을 스러지게하며 새로운 군세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윤승용·유성식 기자>윤승용·유성식>
◎김동진과 김진영/‘왕별기수’ 육사17기 출신/하나회 김진영 승승장구/문민정부들어 “엇갈린 운명”
육사 17기는 육사 동문들로부터 「왕별」기수로 불린다. 57년에 입교한 17기 생도들은 대부분 「군사보국(軍事報國)」이라는 웅지를 지닌 전국 유수 명문고 출신과 「논두렁 천재」로 불리는 시골고교 우수학생들이었다. 총 입교생 250명 가운데 절반이상이 서울대에 복수합격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통상 한 기수에서 30여명만이 장군진급에 성공하는데 비해 17기는 43명이나 별을 달았고 2명의 참모총장을 비롯, 4명의 4성장군, 1명의 안기부장, 2명의 국방장관을 포함한 4명의 장관, 2명의 경호실장, 2명의 병무청장, 그리고 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기라성같은 동기생 가운데 임관때 경복고출신의 김동진 전국방장관이 수석으로 졸업했고, 부산고출신의 김진영 전육참총장이 성적과 리더십등을 포함, 장교로서의 자질을 종합해 수여하는 「대표화랑상」을 받았다.
두사람은 출발때부터달랐다. 김진영은 하나회 동료 4명과 함께 1차로 별을 달았지만 비하나회인 김동진은 2차로 장군으로 진급했다. 활달한 성격에 보스기질이 남달라 생도시절부터 「미래의 참모총장」으로 불렸던 김진영은 하나회「대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12·12사건 당시 33경비단장을 지냈고 이어 수기사단장, 수방사령관 등 노른자위 보직만을 거쳤다. 그러나 6공들어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소위 9·9인맥(9공수여단, 9사단출신 인맥)이 득세하면서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전보되기도 했다.
반면 김동진은 수석졸업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교수요원으로 선발돼 미 조지타운대로 유학, 언어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육사에서 영어교관 생활을 했다. 그 덕에 그는 소령때인 70년 「영어실력」이 뛰어난 장교를 찾던 이재전(李在田)당시 한미야전사부사령관의 눈에 띄어 부관으로 발탁된 후 국방장관 보좌관, 사단장, 정책기획관 등을 거쳤다. 그러나 하나회원 김진영보다 항상 한발 늦게 승진하는 분루를 삼켜야했다. 한미연합사부사령관직을 김진영으로부터 물려받은 데 이어 참모총장마저 김진영으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법. 김진영은 문민정부들어 임기도 채우지못한 채 총장에서 전격해임된데 반해 김동진은 총장직을 인계한 후 승승장구,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장관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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