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낱말의 뜻을 분명하게 가려내기는 어렵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문화민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중국문화의 큰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만의 독특한 문학과 예술이 존재해왔기 때문에 근대화 이전의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문화민족으로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100년에 걸친 개화의 충격이 다소 진정된 오늘,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한글이라는 것이 독특하게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연구나 보급에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글문화의 발전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군사문화니 일본문화의 식민지니 하는 말은 자주 하면서도 한글문화를 깊이있게 다루어 본 정권이 없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사실입니다.
「한국적인 것」을 찾는 노력이 대대적으로 전개돼야 마땅하고 이런 일을 위해서라면 한강 위에 다리 하나를 세우는 사업을 뒤로 미루어도 좋고, 경부고속철도 공사를 전면 중단할만도 하다고 믿습니다. 민족이란 결국 정신인데 정신의 자세를 가다듬지 않고는 근대화도 산업화도 다 헛것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셈입니다. 외화가 바닥이 나고 주식값이 폭락하고 금리가 천장을 모르고 치솟아 경제의 위기가 임박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그 원인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란 결국 자존심이 결핍된 사람들의 난치병이 아닙니까. 탐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긍지를 잃은 사람들의 정신박약증세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뚜렷하게 자아가 형성되어 있고 자존과 긍지의 삶이 가능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있는 지도자라면 어떻게 『쌀시장 개방은 내자리를 걸고 절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남들을 향해 『우리 물건을 많이 사 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그러나 당신네 물건은 하나도 안사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수입품 안사기운동」을 공공연하게 부추기는 행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의 부족만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심의 결핍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비자인 국민이 외래상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고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국인의 긍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께서는 민족성의 올바른 개조를 위해 선두에 나서야 하겠고 , 이 일을 위해 문화적 행사에는 다른 어떤 대통령보다도 큰 정성을 기울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청와대에서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쯤은 당대의 정상을 차지한 세계적 음악인들을 초청, 공연토록 하여 외국에서 와 있는 외교관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갖도록 마련해 주셔야겠고, 그림이나 조각의 전시회가 청와대에 마련된다면 굶주린 예술인들의 생계를 돕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안가라는 곳에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하는 그런 대통령들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고 믿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김대중대통령께서는 문화대통령이 되시기 위해 경제대통령이 되셔야 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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