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한해 全씨와 35차례 회담/‘비밀일정’따라 주요인사 예방… 재임중 4만여명 만나/때때로 20분마다 약속 진료예약받은 의사같은 기분/“한국정부와 밀착” “꼭두각시 정부” 오해우려 공개안해미 대사가 얼마나 바쁜 직책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사의 서울에서의 전형적 하루 일과를 대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아내와 나는 아침 6시 자명종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는 재빨리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고, 코리아 타임스등 한국의 두 영자신문을 훑어봤다. 종종 우리는 하루늦게 관저로 배달된 미국신문들을 보곤 했는데, 그것은 간밤에 홍콩에서 오거나, 미국에서 직접 배달된 것이었다.
아침 7시는 한국어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때때로 그것은 재미있는 일과였다. 우리 선생인 이경희(여)씨는 내가 한국어와 영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데 자주 웃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이중 몇가지는 서울장안에 퍼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미 대사가 하는 일에 대해 잡담이나 농담을 하기를 좋아했다. 그중 한국친구들이 알고 있는 하나는 「It is a long time since I have seen you」라는 뜻의 한국식 표현인 「오래간만입니다」의 해석방법이었다. 나는 이것을 『나는 오리건주(州)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오리건 출신입니다』로 말하기도 했다.
한국어수업중 종종 전화가 걸려와 방해가 됐다. 대사관 당직간부가 아침일찍 전화해 워싱턴으로부터 온 중요한 전문(電文)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는 보통 아침 8시15분에 사무실에 도착해 부(副)대사나 경제·정치 참사관과 회의를 가졌다. 대사관 직원들은 방문객들이 논의하려는 안건과,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사관에 얼마나 기대하는가 등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내 책상에는 그날의 하루일정 목록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 목록을 기밀로 분류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대사의 얼마남지 않는 빈 시간을 끊임없이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시간에도 보고서를 구술하고, 직원들과 회의를 가져야 했다. 그날의 일과표에 따라 나는 주요인사들을 예방(禮訪)하거나 회의를 가졌다. 때때로 오전중 나는 매 15분 혹은 20분마다 진료약속이 있는 의사나 치과의사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중간중간 나는 방문객과 논의해야 할 안건, 그리고 필요하다면 취해야 할 조치등에 대한 메모를 비서에게 구술했다.
어느날 나는 「한국방적공업협동조합」(Spinners and Weavers Association of Korea·SWAK)이 초청한 「미스 미국 목화아가씨」를 만나게 돼 매우 기뻤다. 그녀는 아주 매력적이고 지적인 젊은 숙녀였다. 나는 내 사무실에서 그녀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한국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듣는데 아주 행복했다. 그녀는 3, 4일간 지방에 머물렀고, 비무장지대(DMZ)를 찾기도 했다. 나는 미국 주요 업체들의 실무 간부진과 회담을 갖곤 했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사업전망에 대해 논의했다. 이 모임은 나에게는 중요했다. 내 재무관이 그 자리에 참석하면 우리는 미 사업가가 한국에서 부닥칠수 있는 여러 세세한 어려움을 들을수 있었다. 가끔 우리는 도움과 충고를 줬다.
점심시간때는 한국사람 및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현안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듣고, 토의할 기회를 가졌다. 종종 미국에서 온 이익집단과 점심을 같이 할 때도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칠때까지 나는 하루의 첫 반쪽을 정말 엄청나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날수 있었다.
가끔 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대개 오후도 바쁘기는 아침과 같았다.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군기지가 있었다. 미 대사와 미군사령관으로서는 우리가 미국의 한 일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미 대사관은 주한미군 및 한국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한미군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저녁시간에 내 아내와 나는 외교행사장에 참석하거나, 친구들 혹은 다른 외교·군사간부들을 초대하곤 했다.
항상 리셉션과 만찬이 있었고, 2주에 한번꼴로 나는 만찬에서 연설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모든 그룹의 사람들은 미 대사가 자신들을 위해 연설해줄 것을 요구하고 또 기대했다. 나는 「태평양 군통신·전자협회」(Armed Forces Communications and Electronic Association of the Pacific Region·AFCEA)의 지역회의에서 가진 연설이 얼마나 길고 어려운 작업이었던가를 회상했다. 대한적십자사와 같은 여러 다양한 한국조직들이 나를 초대했다. 내가 선호하는 그룹중 하나는 「한미협회」였고, 나는 회장을 맡고 있는 송인상(宋仁相)씨의 요청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참모진들로부터 자료를 받아서는 직접 연설문을 썼다. 연설이 한국그룹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대개 잘못 인용되지 않도록 연설이 올바르게 번역됐는지를 꼼꼼이 확인해야 했다. 많은 준비가 있어야함은 물론이었다. 특별히 중요한 연설을 할 때는 우리는 며칠전 미리 연설복사본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 안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1주에 2번,더 많을수도 있지만, 나는 관저에서 점심이나 만찬을 주재했다.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또한 벅찬 시간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특히 나에게 의미있었다. 예를들어 매년 성탄절때면 나는 「한국 예일대 동창회」를 위해 연말 만찬을 주재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당시 예일대 동창회의 회장이었던 이홍구(李洪九)씨가 나중에 총리가 됐고, 집권당의 지도자(신한국당 대표위원)까지 됐다. 우리가 한국을 떠날때 나는 행정참모에게 내 아내와 내가 서울에서의 재임기간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영접했는지 계산해 보라고 요청했다. 4만명이 넘었다.
바쁜 주중(週中) 일과동안 밤 11시 이전에는 우리는 거의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토요일 대사관은 정오에 문을 닫는다. 한국친구들과 그외 여러사람들은 우리가 토요일밤에는 자유로워서 외출하거나 파티를 열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개 그런 밤을 환영했다. 가끔 우리는 주말을 이용, 멀리 나갈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대천해수욕장에 가거나, 거기서 속리산까지 가는 것을 좋아했다.
전형적인 하루일과의 또다른 일면은 오고가는 전문들을 관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전문은 특히 토요일 오전에 가장 많았다. 한국의 토요일 오전은 미국에서는 금요일 밤이었다. 국무부나 상무부 관리들, 여타 다른 정부기관들은 대개 금요일날 업무를 끝내기를 바랐다. 결국 오후 늦게 그러니까 한국으로서는 토요일 새벽 3, 4시쯤 그들은 대사가 해야 할 이것, 저것을 전문으로 보냈다. 때때로 특별한 이슈에 대해서는 그들은 즉답을 원했다. 이것은 매 토요일날 오전이면 주중의 다른 날보다 전달돼 오는 전문이 2배가량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끔 워싱턴은 대략 몇시간후에 대답을 받기를 원했다. 워싱턴의 외교정책 담당자들은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내가 사무실에 도착했을때 정기적으로 내가 검토해야 할 메시지가 20∼30건 정도 됐다. 하루를 끝낼때까지 대사관의 많은 참모진들은 보고서를 기안해 전문을 보냈다. 우리 대사관은 1년에 1만5,000건이상의 전문을 보냈다. 대사관을 나가는 모든 전문은, 그것이 비록 대사관 살림살이와 같은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내 서명이 필요했다. 내 동료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거나, 민감한 내용의 메시지를 내가 확실히 검토할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나는 내 서명을 거쳐 나가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중요하고 민감한 전문에서는 나는 보통 미리 초안을 보고, 제안을 해 수정했다. 전송되는 전문들은 대개 오후 4시반에서 5시반사이에 대사관 통신실에서 보내졌다.
재임기간중 몇몇 주요 전문들을 보면, 대사관이 정책입안과 정책조직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대사는 주요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때때로 매우 짧은 시간내에 어려운 문제를 다뤄야 했다. 물론 급박할때는 모든 사람은 대사에게 명확한 분석과 안정적인 일처리 및 의사결정 능력등을 요구했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책임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강연했다. 나는 미 외교사와 외교정책에 관한 서적, 그리고 내 동료가 쓴 몇몇 자료를 검토했다. 그러나 나는 정책을 계통화시키는 과정에서 대사가 할수 있는 임무에 대한 그들의 이해정도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를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결정과정에서 주요 인사와의 직접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그 서적들은 전혀 분석하지 않았다. 대사와 워싱턴의 정책 결정권자사이의 친밀한 실무관계, 혹은 주재국의 개인 상호간 관계의 역동성에 대해 그 필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미군사령관과 나는 북한관계에서의 민감한 사안에서는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침이 필요했다. 나는 국무부에 전문을 띄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완전하고 또한 즉각적인 지침을 바란다』고 전했다. 그것은 최고위층에 전달됐다. 거기서 나온 즉각적인 회신은 나보고 워싱턴에 와서 상담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돌아갔을 때 그곳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무부는 중요한 안건에 대한 정책에 대해 나에게 초안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나는 거기서 지침이 필요하다고 내가 한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보았다. 즉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받아볼 지침을 내가 직접 작성토록 했다. 나는 내가 마치 톰 클랜시(미 소설가·「작전센터」등 한반도 소재 소설 다수)의 소설속의 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대사와 중요 상담자들은 주재국 사회의 현 상황과 미묘한 차이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경제계와 정부, 학계에서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서(情緖)를 알아내야 했다. 정확한 분석을 워싱턴에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친밀한 접촉을 통해 알아낸 정보와 통찰력 있는 분석은 전문을 통해 보고되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다. 정보가 유출돼 정보원에 커다란 당혹감을 줄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정보원의 신분이 노출될 때도 자주 있었다. 대사는 정보원의 신원을 보호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했다. 본국 또는 주재국 정부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은 『대사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냐』는 게임을 하는데 매우 능숙해 있었다.
미 대사의 생활은 결코 예사롭지 않는 몇몇 사안을 빼고는 어느정도 일상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85년 한해동안 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35번 이상 회담을 갖었다. 미국에서 온 고위관리의 방문과 관계된 것도 많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나는 대통령에게 특정정책에 대해 다소 완화된 정책을 취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이같은 회담을 전문을 통해 보고하지 않았다. 국무부 고위관리들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 논의에 대한 정보는 보호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한국의 대통령과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가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몇몇 야당인사들은 이를 통해 내가 한국정부와 너무 밀착해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하나 고려해야 할 사항은 회담이 너무 많이 공개되면 한국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북한의 선전선동을 강화시켜주며 북한의 전략에 빠져들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외무장관, 비서실장 혹은 다른 각료들과의 만남은 내 재임기간중 정말 많이 있었다.
요컨대 미 대사의 전형적인 하루일과는 무엇일까.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방위동맹국이며 미국의 존재가 두드러진 지역인 한국같은 나라에서 사색과 친목을 다지는 편안한 삶은 기대할수 없었다. 끊임없는 활동과 난제(難題)들이 일주일 7일을 꼬박 일하게 하며 대사의 임무를 흥미진진하게 했다. 매일매일 임무를 수행하면서 진정 주재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진정한 만족을 얻을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배울만한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나의 직책은 매력적인 사람들과 함께 힘들지만 가치있는 일들로 가득찬 시간이었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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