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3시 워싱턴 중심가의 한 호텔. 한때 서울의 재벌총수중 한명으로 쟁쟁하게 이름을 날렸던 한 「미국시민」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다 중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전 삼호그룹회장 조봉구(趙奉九·79)씨였다. 재계순위 9위에까지 올랐던 재벌그룹의 창업자를 연상키어려울 정도로 완연히 달라진 모습의 그는 『부당하게 빼앗긴 재산과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 싶다』며 울먹였다.지난해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있기 1주일전 조씨는 대림건설과 조흥은행을 상대로 로스앤젤레스 법원에 20억달러에 달하는 재산반환소송을 낸 바 있다. 84년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부실기업이라는 누명을 씌워 기업과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아 대림그룹에 넘겼다는 게 소송제기의 주요 이유였다. 70년대 부동산업계에 신화를 남겼던 조씨는 국제그룹이 해체되던 무렵 중풍으로 쓰러져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세인의 이목에서 사라졌는데 15년만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태평양 건너 이국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판도 관심사지만 정작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미국의 주요 언론이 이 일을 비중있게 취급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은 한국경제가 얼마나 정치적 간섭과 부패에 멍들어 있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한국은 이제 그 휴유증에 호되게 시달리고 있다』고 썼다. 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도 『정권과 기업이 부패한 공생관계를 맺고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희생시킨 대표적 사례』라고 밝혔다. 두 신문 모두 『정치권의 비호를 받아 무분별하게 돈을 끌어들여 무작정 팽창위주의 길을 걸었던 기업이 오늘날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며 「한국식 자본주의」를 맹타했다.
이제 미국으로 귀화해 미국시민이 된 조씨가 과연 미국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을 지는 앞으로 지켜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부패고리의 관행에서 경제를 해방시키는 일은 당장 서둘러야할 우리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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