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특차도입 따른 고득점자 싹쓸이보다 대학간 다양성 이끌어야”한 사회의 대학발전은 입시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국립대학인 서울대가 최근 발표한 특차전형 도입 결정은 대학의 재량권에 속하면서도 대학과 사회발전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다.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주일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명저 「일본인」에서 일본대학은 도쿄(東京)대를 정점으로 수직적 획일적으로 엄격히 위계화되어 있으며 특히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과 일본 교육제도의 유사성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상 서울대와 도쿄대는 닮은 점이 많다.
미국에서는 87년 예일대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저서 「강대국의 흥망」을 발표하면서 「미국 쇠퇴론」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한편 일본경제는 머지않아 미국을 추월할 기세였다. 버클리대 찰머스 존슨교수는 저서 「일본통산성」에서 도쿄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정부와 기업간의 유기적 관계도 일본경제의 강점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미국은 특히 교육과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일본의 그것은 획일적이라고 반박했다. 현대사상가 앨빈 토플러도 일본과 유럽대학들에 비해 미국대학들의 강점은 획일적 집중이 덜 된 다양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도쿄대가 타대학들을 압도한 가운데 일렬로 등수가 매겨지는 획일적 수직적 대학분포형과 미국처럼 대등한 여러 명문대학들이 각기 분야별로 특징과 강점을 갖고 상호보완·경쟁하며, 오늘의 비명문이 내일의 명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는 다원적 대학분포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사회발전에 바람직한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해답은 쉽지 않지만 세계화가 가속되고 있는 오늘날, 일본은 경제발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반면 미국경제는 강한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어 일본형 대학보다 미국형 대학이 더 바람직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대학경쟁력이란 경제발전을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일본의 현 경제위기는 라이샤워 교수도 일찍이 지적한 「국제화에 뒤떨어진 도쿄대」 출신들이 만들어낸 관료주의에 큰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서울대도 이 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도쿄대 출신은 관료부패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지난달 졸업식에서 하스미 총장은 「도쿄대출신은 사죄하라」며 병든 엘리트의식을 질책했고 졸업생들은 줄곧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대학의 다양성이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견해는 검증해 볼만하다.
서울대가 특차전형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대학의 다양성이 쉽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대학들은 지금 마치 한 종류의 나무만 있는 식물원같이 너무 단조로운 모습이다. 그동안 특차제도를 통해 서울대 이외의 대학들도 고득점자를 일부 확보할 수 있어 다양화 이전의 분산화에 다소나마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우리 대학들은 하나같이 재정이 취약해 소비자중심의 교육서비스에 의해 대학의 위상이 정해지기보다는 고득점자 수에 따른 「학생 셀프서비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이런 여건하에서 최고의 수혜자는 바로 서울대라 할 수 있다. 굳이 부언할 점은 다양성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도 일부 고득점자들이 타대학들로 분산되는 것조차 막겠다는 것은 교육의 이념에도 맞지 않는 지나친 욕심이다. 국민의 세금지원을 받는 국립대학인 서울대는 고득점자 싹쓸이보다는 오히려 집중을 완화시켜 대학간 분업적 다양성과 경쟁체제의 발전을 선도하는 것이 국가사회와 서울대 자신의 장기적 이익에도 더 기여하는 서울대다운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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