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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문화 작은 문화/임철순 문화과학부장(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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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문화 작은 문화/임철순 문화과학부장(광화문)

입력
1998.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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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가 있는 40대후반의 경영학교수와 미혼인 30대 패션디자이너의 사랑은 한 마디로 불륜이다. 그들은 낙산의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따로따로 서울을 떠난다. 부도위기에 빠진 인쇄·출판업자가 그들의 밀회과정에 끼여 든다. 그의 자살기도를 지켜 보며 남녀는 3년 넘게 비밀리에 쌓아온 자신들의 사랑에는 거품이 없었던가를 생각한다. IMF사태를 부른 것이 정치적 판단착오나 기업의 실수만은 아닐지 모르며 문화적 허영이나 착각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것이라는 말을 나누면서.이문열이 최근 발표한 「전야(前夜),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이라는 중편소설의 내용이다. 「우리의 사랑에도 지금이 새로운 날의 전야인지, 진정한 어둠이 뒤에 남은 한 시대의 마지막 밤인지 알 수가 없다」는 메모를 남기고 여자가 먼저 호텔방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과연 지금은 한 시대의 전야인가, 더 어두워지는 한 시대의 마지막 밤인가. IMF시대를 맞아 문화·예술은 위축될대로 위축됐다. 문예지마다 문학의 죽음과 비평의 위기를 걱정하면서 「참을 수 없는 작품의 가벼움」을 질타하고 있다. 영화의 경우 연간 100편 이상을 제작했던 한국은 세계 10대 영화시장에 들었지만 올해에는 30편도 만들어내지 못할 전망이다. 공연프로그램이 자주 취소되거나 변경되고 예산도 없어 예술의전당은 공연달력 발행을 중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부도사태에 빠진 출판계도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얼마나 사정이 나아질지 의문이다.

모두가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IMF시대를 본격적으로 다룬 빼어난 예술작품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원래 예술적 형상화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시대의 고통과 암울한 현실을 문화·예술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흡한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언제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위대한 작품은 어려운 시대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 말대로면 이 시대는 예술가들에게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IMF시대는 스피드와 거대화의 미망(迷妄)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IMF사태에 대한 문화부문의 책임을 지적한다면 스피드와 거대화지향을 꼽아야 한다. 스피드는 경박함으로, 거대화는 무모함과 공허함으로 이어진다. 그런 것들의 관성과 가속도가 독약이나 마약처럼 문화의 진정성을 해치고 마비시켜왔다.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후보에까지 올랐던 영국영화 「풀 몬티」는 11개 부문상을 받은 「타이타닉」의 80분의 1수준인 350만달러를 들여 만든 영화다. 그런데 흥행수입에서는 2억8,000만달러를 들인 「타이타닉」이 지금까지 제작비의 4배를 벌어들인데 비해 70배를 벌어들였다. 거대화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 밀란 쿤데라는 최근 번역소개된 「정체성」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듯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하고 묻는다. 95년에 소개된 그의 작품 「느림」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졌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한국인들은 느림의 즐거움을 망실(忘失)했다. 느린 문화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돼버린지 오래다. 1318세대의 감성과 흥분이 문화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스피드와 거대화가 만들어낸 거품을 걷어내고 허영과 착각을 없애야만 우리 문화를 되살리고 문화의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은성(殷盛)하고 화려한 오페라나 교향곡에 집착할 때가 아니다. 가곡과 실내악의 그윽한 깊이에 귀를 열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느려지고 작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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