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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사의 한국생활(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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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사의 한국생활(한국의 추억)

입력
1998.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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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 대통령과 한동안 냉각기/부임 첫해 각료방문 마치자 개각 “날 싫어하는구나” 생각/대천서 주말휴가때 귀경요청 거부로 서먹한 관계 계속/각계인사들 무리한 요구많아 “내정 不간섭” 설득 애먹어1981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나에게 주한 미대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후, 축하전화와 편지가 아내와 내앞으로 많이 전달됐다. 많은 친구들은 내가 앞으로 한국에서 경험하게 될 즐거운 시간들에 대해 얘기했다. 품위있고 유능한 참모진들이 생길 것이고, 또 여가생활과 여행의 기회도 있을 터였다. 어떤 친구들은 일은 별로 많지 않은, 고위관료의 목가적인 생활을 그리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해당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미대사관저에서 윌리엄 포터 대사와 함께 지내왔으며, 필립 하비브 대사 재임중 그가 부여받은 여러 일들을 지켜봐왔다. 그것은 유복하게 목가적인 생활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와 나는 앞으로 한국의 서울에서 닥칠 일이나 분규, 여러 보람있는 일등에 대해 완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어 신문이나 코리아 타임스, 코리아 헤럴드같은 영자신문에는 미 대사가 리본을 자르고, 한손에 유리잔을 든채 외교 리셉션이나 국제무역회의에 참석하고, 군사모임에서 연설하는 사진등이 자주 실렸다. 이런 사진을 통해 내릴수 있는 결론은 대사 생활이란 정말로 하나의 커다란 이해당사자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미 대사생활 5년반을 마친 지금 나는 그것이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할수 있다.

언론에서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외교서류에 담겨있는 내용은 전체 이야기와 동떨어질 때가 가끔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몸짓으로도 많은 것을 얘기하는 국제관계를 이를 통해 다루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에 의한 것이었다. 그럴때 대사는 개인적인 인상을 전달해 본국 정부의 이해를 돕고, 다양한 주요인물의 전기(傳記)나 경력등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 놓는다. 그러나 공식서류를 통해 이같은 인상과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종종 언론에서 그려지는 사회생활은 많은 정보가 오가는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대사가 『XX 장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느냐?』고 얘기했을 때, 나는 그 정보에 대해 모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나라 정부나 해임된 장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 내 아내와 나는 오후에 두 모임을 참석해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행사장에서 참석자들과 인사조차 나누기도 힘들때가 있었다. 거기에는 카메라 기자가 항상 있어서 다음날 신문에 사진이 실렸다. 우리는 15분간 머무르다 조용히 빠져나와서는 다음 행사장으로 갔다. 그 다음에 시간에 맞춰 대사관저로 돌아와서는 멀리 지방에서 온 손님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이었다.

서울에서의 미국 대사관과 대사는 한국에서 중심적이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몇몇 외교관 동료들이 이런 점을 매우 부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힘든 일이라는 것도 그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81년 주한미군은 4만명이 넘었다. 대사관은 한반도에 있는 미군기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이 80년대 한국의 절대적인 무역 파트너라는 사실은 활동영역이 다양한 대사관과 관계가 깊었다.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한국의 최고지도자들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임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두드러진 존재였다.

한국의 미 대사관 참모들은 650명이상이 됐다. 사실 나는 이 650명을 책임지는 전문경영인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의 우월적 지위와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라는 존재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한국의 지도자 및 시민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어떤 일을 결정해 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우리는 그럴때마다 한국군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북측 선동가들의 계략에 빠지곤 했다. 솔직히 시인하건데, 전두환(全斗煥) 정부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직접 일을 결정했으면 하고 바랐던 때가 있었다.

한번은 몇몇 한국지도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저녁만찬후 우리 대사관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몇마디 해줄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미대사관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해 그들에게 대략 설명해줬다. 『당신 정부와 일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해당국가의 일이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물공급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서울시장에 연락을 취할수 없었다. 외무부를 통해야만 했다. 우리는 야당지도자나 야권단체를 지원해주는 조직이 아니었다. 김대중(金大中)씨의 지지자들은 자주 미 대사관 참모들이 그의 대의(大義)를 위해 좀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 대사관은 미국인들사이의 언쟁이나, 미국인과 그 한국상대역간 다툼에 치안판사의 역할을 할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한국지사장이 과도한 집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는 미국 회사를 위해서 우리가 중재역을 맡을 수는 없었다. 언론에 대해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미국의 몇몇 인사들조차 한국언론에 실린 수사(修辭)의 수위를 완화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우리는 한국언론을 통제하려고 시도할수 없었다. 미국신문에 보도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했다. 때때로 반대되는 논점을 갖고 있는 워싱턴의 인사들은 미국 언론이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 지긋지긋한, 신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종종 그들의 비판대상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관습을 바꿀수 없었다. 어떤 하원의원은 새벽 3시반에 전화해 한국사람이 개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을 내게 요청하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겠는가?

대충 자리가 잡힌지 얼마 안돼 나는 재임기간중 필요로 할만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중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겠다. 첫번째로 내가 신임장을 제정한 한국 정부에는 많은 지부(支部)들이 있었다. 청와대를 포함한, 많은 주요 관리들, 각료등이 그들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내가 방문해야 할 각료급 간부는 26명이었다. 이것은 내각에 대해서뿐 아니라 각료와 주요 간부들에 대한 배경 및 이해관계등을 읽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보고서를 준비하고, 관리들과 약속을 했다. 그후에 대사관 참모중 적절한 사람을 대동해 모임에 나가곤 했다. 만약 통상·산업분야의 장관이라면 재무관이나 상무관을 데리고 갔다. 우리는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그 장관과 상견례를 겸한 공손한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초점이 되고 있는 여러 현안을 특정 장관과 논의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보낼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은 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정말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26번째 각료에 대한 방문을 막 마쳤을 때, 그는 개각을 해버렸다. 내가 한국에 부임한 첫해 나는 50명이상의 각료를 방문했다. 이 모임 하나하나는 모두 수시간이 걸렸다.

또다른 사람들은 외교집단이었다. 몇몇 대사관들은 대사와 한두명의 참모진들만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부(副)대사직마저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거만하게 보였거나, 적절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남미국가에서 우리를 자신들의 동맹국으로 너무 믿은 나머지 특별히 고려해줄 것을 바라기도 했다.

주한미군은 주요한 「고려대상」이었다. 대사관과 미군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나는 리처드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 하비브 대사를 포함, 많은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미군과 원만한 실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미사령관(CINC)과 상시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재임기간중 3명의 주한미군사령관이 있었다.

대사관 산하에 미합동군사지원단(JUSMAG)이 있었다.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고, 대사관 하급기관이었다. 그는 약 60명의 참모진들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휴 퀸 소장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앤은 특별한 친구였다. 우리는 함께 여행했고, 골프를 쳤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애정은 계속될 것이었다. JUSMAG의 책임자는 약간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술적으로는 군인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미 대사밑에 예속돼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4성장군인 미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로서는 어려운 역할이었다.

다른 중요한 사람은 미 경제계였다. 경제인들은 자주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다른 문화와 상이한 경제활동관습때문에 부과된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나는 매달 정기적으로 미 상공회의소(American Chamber of Commerce) 지도자들과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일년에 두번 AMCHAM 회원에게 설명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대부분의 AMCHAM 지도자들은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미 대사와 접촉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사가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야 할 또다른 그룹이 있었다. 한국전역에서 한국의 기독교인과 함께 일하는 선교사들, 미국학자들, 교환연구원, 한국에서 활동중인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에서 미국학교에 다니거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많은 미 학생들은 대사관, 특히 미대사가 자신들에게 유용한 존재이기를 바랐다.

물론, 「비보도」를 전제로 나와 대화하기를 원했던 미 언론과 국제언론단체의 대표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점심을 같이 하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었던 언론그룹이었다. 이들중 몇몇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됐다. AP, UPI,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들은 자주 나의 견해를 듣고싶어 했다. 일본 도쿄(東京)에 주재하고 있는 기자들조차 대사로부터 브리핑을 듣기위해 서울에 오기도 했다. 이 기자들중 몇몇은 매우 치밀한 연구를 해 가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몇몇 사람과 비보도를 전제로 대화를 나눴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약속이 깨지지 않았다.

물론 나의 시간을 뺏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도 있었다. 국회대표단이 그중 하나였다. 국회 휴회기간중 상원 및 하원의원들은 주한미군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드러내기 위해 오기를 원했다. 그들은 또한 80년대까지 한국은 쇼핑의 천국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이태원의 쇼핑거리를 걸어보고 싶어했다. 미 주지사들도 통상사절단을 이끌었다. 내 재임기간중 나는 36명의 미 주지사들을 만났고, 대접했고, 또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정치관계위원회나 국회참모진들은 한국에 와서 대사와 시간을 같이 하며 브리핑을 원했다.

미 정부의 다양한 민간사회는 자주 일의 진행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대표단이나 단원을 대사관에 보냈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007기 격추당시 미 교통안전국(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과 미항공협회(American Airline Association)에서 온 대표단이 있었다. 그런 단체들은 미 대사의 견해를 구했으며, 부대사나 경제·정치 참사관이 만나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다른 대상은 내 아내와 내가 대사로 부임하기 전 25년이상 친분관계를 맺어온 많은 한국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대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나도 지역현상과 한국개발에 대해 그들로부터 매우 솔직하고 직선적인 견해를 들을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중요한 그룹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때가 미 대사생활중 가장 가치있는 유일한 때였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었다. 2,3일 쉬기위해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쉽지 않을만큼 재임기간중 너무나 많은 요구사항이 있었다. 딱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우리 숙소에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손님 한분이 갑자기 서울에 오셔서, 나와 다른 외교관들이 이 중요한 손님을 맞아주기를 전두환 대통령이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는 지금 휴가중이고, 그래서 그럴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의 이 말에 상당히 당황하며, 대통령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며칠간은 그럴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대통령께서 헬기를 보내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대통령과 그 직위를 존중하지만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그당시 나는 그럴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청와대와의 관계는 한동안 냉각기가 계속됐다. 내 아내 그리고 몇몇 한국친구들과 함께 개인적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그당시에 생긴 어색하고 서툴렀던 한 상황이었다. 대사직이라는 신분이 개인생활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 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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