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밖에 모른 ‘산업지도자’/15년전 우정어린 저녁초대이후 ‘일벌레’와 교제기회/알래스카 담수화 공장건설때 ‘모험기업인’ 깊은 인상/現 한국 위기도 대우의 창의적 대응력으로 극복 믿어1997년 한해동안 나는 내 친구인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과 두번 자리를 함께 할 기회를 가졌다. 첫번째는 4월20∼25일 김회장과 이경훈(李景勳) 중국지역본사 사장(당시 (주)대우 아메리카 법인 회장)이 「대우모터 2000」행사장에 나를 초대했을 때였다. 외국손님만도 200명이상이 참석한 그 훌륭한 모임은 김회장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웅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과거 「은둔의 나라」라는 전통적 이미지와는 판이한, 세계를 조망하는 새로운 한국적 시각을 구현해냈다.
두번째는 97년 12월2일 다른 재벌지도자처럼 원기왕성한 김회장이 한국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고는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경훈 사장, 손병두(孫炳斗)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과 점심을 함께 했다. 김회장은 당시 온 서울을 휩쓸고 있던 비난여론때문에 격앙되고, 또 분명히 혼란스런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용붕괴가 대부분 재벌지도자에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때 제시했던 조건들에 대해 그는 매우 격한 반응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이 두번의 경우처럼 서로 상반된 만남은 없을 것이다.
4월22일 750명이상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모터 2000에서 나는 축하답사와 함께 김회장의 제안에 따라 축배를 제의할 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이런 행사를 불과 하루전에 통보받았다. 그렇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랫동안 김회장의 경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 그가 나의 특별한 친구,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인상깊은 사람중 한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계각지에서 온 이 모든 손님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갖었다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3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들과 함께 김회장의 사업계획, 세심한 주의, 조직력, 리더십등에 대한 존경심을 공감할수 있었다. 점보여객기로 바다를 건너온 우리들은 버스와 기차, 헬기를 타며 브리핑장으로 달려갔고, 현대적 공장을 견학했다. 대접도 잘 받았다. 나는 『4∼5일후 우리가 지쳐버리더라도 우리 모두는 전혀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김회장은 1년에 300일 이상을 이렇게 생활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이 약 15년전에 가졌던 경험을 자세히 얘기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지 채 1년이 안된 어느날, 내 아내와 나는 김회장으로부터 자택 저녁초대를 받았다. 김회장과 그의 훌륭한 아내 정희자(鄭禧子·현 대우개발 회장)씨는 한강이남에 자리잡은, 소박하면서 요란하지 않은 한국식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대사 관용차가 너무 커 그 동네의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회장의 비서는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고는 회장께서 대우의 조그만 차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내가 통신이 가능한 대사관 차를 사용해야 한다며 잠시동안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사관 간부와 그날 저녁 일에 대해 특별히 사전협의를 한뒤 김회장의 차가 도착하자 세니와 함께 그의 집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남산터널앞 신세계백화점 네거리에 막 도착했을 때, 택시가 옆을 스치듯 우리차와 부딪쳤다. 김회장의 운전사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다행히 수분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대우 본사에 재빨리 연락했다. 우리는 10분이 안돼 도착한 다른 대우차로 김회장 자택에 가서는 조용하고 우정어린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대우모터 2000에서 김회장이 그 당시 기록적인 시간으로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내가 군산의 훌륭한 신공장을 둘러보기 전 그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격조있는 웃음과 동감의 말이 뒤따랐다.
한국 사람은 대부분 김회장의 이야기를 잘 안다.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는 재벌 지도자로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50년 한국전쟁때 그는 가족을 잃었지만(학교선생님이었던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결국 연세대에서 학업을 마칠수 있었다. 이것은 높은 교육을 받은 동료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를 그에게 확신시켜 준 계기가 됐다. 김회장은 이를 계속 수행해나갔다. 김회장은 경영과 기업활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영문제목)라고 이름붙인 책속에 담았다. 그 책은 89년 한국어로 출판됐고, 92년 영어로 다시 나왔으며 이후 많은 언어로 번역돼 200만부이상 팔려나갔다.
최근 몇달동안 몇몇 대재벌 지도자들에 대한 극심한 비판의 소리가 있었다. 특히 그당시 몇몇 총수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기업자산의 일부를 능력이 부족한 아들이나 친척들에게 빼돌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김회장은 아니었다. 그의 생활습관은 단순했다. 일, 일, 또 일뿐이었다. 그는 하루 24시간중 4∼5시간만 자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족 영지(領地)를 만들지 않았다. 새로운 사업분야로 대우가 급속히 팽창해나가던 초기시절, 비평가와 경쟁업체들은 김회장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편애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었던 김회장의 아버지가 한국의 대통령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대한조선공사(대우중공업 옥포조선소 전신)와 이어 부실해진 옥포조선소를 김회장에게 인수토록 요청한 것은 상상력으로 충만해있고, 「할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지도자들중 김회장이 가장 설득력있고 성공적인 경영수완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현대 공업사회에 진입하는 한국의 이 일벌레 지도자를 관찰하고 교제할 기회를 자주 가질수 있었다.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던 97∼98년 겨울 한국이 「동아시아 붕괴」에 대한 세계각국의 주된 걱정거리로 떠올랐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김회장을 의지하게 됐다. 그리고 한국이 이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다른 대기업들처럼 대우도 신용한도를 넘어 대출을 하는 위험스런 관행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폴란드에서부터 모로코, 중국,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국제규범을 적절히 수행해나가는 대우그룹 초기의 창의적 대응을 줄곧 지켜봐왔다. 그래서 그들은 대우의 구조조정과 적응력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표시해왔다. 나는 대우같은 그룹이 있다면 한국은 결국 현 위기를 극복할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같이 했다.
15년도 더 지난 어느날, 나는 대한항공편을 이용,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김회장은 내 자리 복도건너편에 앉았다. 우리는 간간히 대화를 나눴다. 김회장은 서류와 보고서를 살펴보고는 미국 비즈니스 잡지에 흠뻑 빠져들었다. 알레스카 앵커리지를 2시간남짓 남겨놓았을 때, 김회장은 담요를 머리위까지 끌어올리고는 잠이 들었다.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올때까지 김회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 승무원에게 걱정스런 말투로 이 신사분이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김회장은 아무 문제없으며, 가끔 이럴때가 있다고 그 승무원은 대답했다. 김회장은 유일하게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요구받지 않을 정도로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했고, 몇시간후 그는 똑바로 앉아 바로 일을 재개했다.
김회장이 연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때 아내와 나도 참석했다. 김회장과 그의 아내 정회장은 우리가 참석한데 대해 감사했다. 우리도 또한 83년 12월7일 서울 힐튼호텔의 화려한 개업식에 초대받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니는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으면서 우아함마저 갖추고 있는 정회장과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회장의 부인은 지금 이경숙(李慶淑)씨가 총장으로 있는 숙명여대를 졸업했다. 나의 옛 제자이며 총명한 여성이었던 이경숙 박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김회장 부부를 방문했을 때 이박사와 고려대 부총장인 그녀의 남편 최영상(崔永翔) 박사도 가끔 자리를 같이 했다.
한국에서 여행하는 동안 나는 김회장 및 대우그룹과 관계된 흥분과 모험을 경험할 많은 기회가 있었다. 미국회사와 계약관계상, 또 옥포에 초대받은 미국 방문객들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때문에 아내와 나는 종종 조선소를 찾았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 프루드호에만(灣)이 목적지인, 해상에 떠있는 거대한 담수(淡水)화공장 건설과정을 지켜보았다. 한국에서의 가장 광대하고 복잡한 사업중 하나로, 규모가 2억2,500만달러인 이 프로젝트는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 완성돼야 했다. 왜냐하면 북알래스카로 통하는 얼어붙은 해역이 1년중 인도되기로 예정된 단 2주동안만 수로가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김회장의 지휘아래 작업을 진행시킨 대우는 예정된 날짜에 정확히 해상(海上) 공장을 예인선에 견인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인도할수 있었다. 88년 프루드호에만을 방문한 우리는 미국 석유전문가들이 대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석유가 매장돼 있는 지역으로 담수를 어떻게 펌프질해 내느냐에 그들의 석유·가스 생산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김회장은 항상 유능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원을 자신의 참모나 감독직으로 뽑아왔다. 이들 간부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과 노하우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대우가 82년 12월 12척의 컨테이너 선박 건조를 위해 미 최대 화물선박회사인 「유에스 라인스(U.S. Lines)」와 5억7,000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할때 이같은 대우의 능력을 잘 관찰할수 있었다. 그때 체결된 계약은 상업용 선박수주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후 얼마안돼 그 미국회사는 심각한 경영상의 애로로 계약관계를 취소해야만 했다. 대우가 첫번째 배를 이미 건조한 뒤였다. 대우로서는 커다란 위기였다. 그러나 다른 거래선과의 거래에 성공함으로써 이를 극복했다. 98년 대우는 세계 최고 선박회사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다.
90년 11월 미 매서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대학원과정을 밟던 김회장의 장남이 자동차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있던 김회장 부부에게 즉시 연락을 취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이때가 김회장이 일손을 잠깐 멈춘 유일한 경우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회장은 우리가 보냈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당신의 따뜻한 위로편지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입니다. 슬픔이란 확실히 서로 나눌때 보다 잘 극복될수 있습니다」 90년 12월11일의 이 편지는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 세니가 그해 2월 세상을 떠났을 때, 김회장 부부는 나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경제위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98년 한국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가를 위해 다시 희생하고 있는 이때, 재벌과 그 총수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국내에서나 외국에서나 이들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세계의 재정 전문가들은 이들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몇몇 재벌에게는 국제적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리스크를 모험적으로 택한 것이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굳건한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김회장은 「스스로 일어선 나라」 한국을 돕는 산업지도자로서 아직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94년 5월 우리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김회장에게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 기회를 빌어 그것은 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혀둔다. 그 명예학위에 대한 인사말을 쓰는 것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몫중 하나였다. 나는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몇몇 귀절은 다시 인용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모험적이고 빈틈없는 이 한국의 지도자를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앤드류 카네기와 같은 반열의 인사로 만든 것은 교육과 박애, 공공서비스 기관에 대한 그의 헌신적 노력덕택입니다. 김회장은 성공의 과실을 개인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기초과학의 연구활동에 투자했습니다. 또 병원과 의료연구시설을 세우고, 도서관과 고등교육기관을 설립·지원해왔습니다. 자선재단을 통해 김회장과 그의 다재다능한 부인은 문화·미술활동을 지원해왔으며, 한국 그리고 인간경험에 대한 기여로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데 한 몫을 해왔습니다」
김회장 가족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특히 나에게는 매우 뿌듯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김회장이 오랫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오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이었다.<번역=황유석 기자>번역=황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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