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1837∼1913년)와 정토진종(淨土眞宗) 중흥의 고승 렌뇨(蓮如:1415∼1499년)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NHK 방송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인기 행진 속에 그의 삶을 다룬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렌뇨의 500주기를 1년 앞두고 벌써부터 재조명 작업과 기념 문화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요시노부를 보는 일본인들의 눈에서 「마지막」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대신 왜 지금은 저런 지도자가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도쿠가와 가문의 한 갈래인 미토(水戶) 집안에서 태어난 요시노부는 에도(江戶:도쿄)의 히토쓰바시(一橋)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격동기의 역사에 휘말린다. 미국 「흑선(黑船)」에 의한 강제 개항과 새로운 체제를 위한 꿈틀거림 속에서 그는 중병을 앓았던 이에모치(家茂) 쇼군의 후견인으로, 또 그의 사후에는 쇼군의 자리를 이어 정치 개혁과 군비 강화에 힘썼다. 쇼군 등극 1년만에 메이지(明治) 유신의 격랑앞에 권력을 내놓고는 죽는 날까지 은거하면서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렌뇨의 삶은 이름처럼 연꽃같았다. 6세때 부모를 잃고 정토진종의 본산인 혼간지(本願寺)에서 자랐다. 17세때 출가, 독학으로 교(敎)를 닦아 정토진종 8대 종사가 됐고 스러져 가던 혼간지를 대가람으로 다시 일으켰다. 그는 「오닌(應仁)의 난(1467∼1477년)」이라는 대전란으로 삶의 피폐가 극에 달했던 시대를 관통해 살았다. 사후의 정토를 위해 늘 염불하면서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가르침으로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졌다. 또 현세의 무욕과 근면을 강조했다. 그의 이런 「보은(報恩)과 무상(無常)」의 사상을 두고 오사카(大阪)대학 가와무라 구니미쓰(川村邦光) 교수는 『일본 정신사가 비로소 「섬나라의 척박함」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두 사람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은 무력한 정치와 경제 위기의 반영이다. 「외세」와 격변, 생활의 위협. 요시노부와 렌뇨의 시대가 겹친 듯한 우리 상황도 지도층의 의지와 결단, 대중의 인내와 관용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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