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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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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5)

입력
1998.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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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공천 주무른 “金·三·宗트리오”/87년 대선후 “感의존” 패인분석,여론조사 ‘중조연’ 설립 정치입문/13代 “황색돌풍” 예측 신임… 민사연·나사본 조직 ‘제1참모’ 부상/절정기 96년 총선 ‘세대교체 공천’ 개입 정치권 기반구축 성공김현철(金賢哲)씨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YS가 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대선기간에도 아버지를 돕긴 했으나, 가까운 친구들과 봉고차를 직접 몰고 다니며 홍보물을 돌린 정도였다. 현철씨는 나름대로 대선 패인을 크게 두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YS가 지나치게 감(感)에 의존하는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후보의 상품성에 비해 보좌진의 능력이나 충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손을 댄 것이 중앙조사연구소(중조연)란 이름의 여론조사기관 설립이었다. 초창기만해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중조연이 YS와 상도동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게 된 계기는 88년의 13대 총선이었다. 중조연은 당시 김대중(金大中) 총재가 이끈 평민당의 「황색돌풍」을 정확히 예측, 상도동 진영에 「과학정치」의 개념을 선보였다. 현철씨가 정치권에서 「김소장」으로 통칭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중조연 설립멤버였던 Q씨의 회고.

『김소장은 상도동 진영의 선거전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YS자신 숫자감각이 부족한데다 참모진도 주먹구구식 보필을 한다는 것이었죠. 비슷한 또래 6∼7명으로 중조연을 만든 것은 「여론있는 곳에 정치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감의 정치에 숫자의 정치를 도입하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13대 총선 결과가 나오기전까지는 적잖은 곤욕을 치렀습니다. 경험도 없는 젊은 것들이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다」는 예상을 내놓았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조연의 예측과 선거결과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YS가 김소장의 능력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중조연 시절이 현철씨의 정치적 입문기였다면 3당합당(90년 1월)에서 YS의 대통령후보 선출(92년 5월)까지는 그의 정치적 성장기로 분류될 수 있다. 3당 합당 다음날 현철씨는 가까이 지내던 소장그룹과 사조직 결성에 뜻을 같이하게 된다. 「상도동 조직만으로는 정권을 못 잡는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광화문팀」으로 불린 민주사회연구소(민사연)는 이렇게 해서 탄생됐다. 중조연을 흡수통합한 민사연은 그해 5월 서울 중학동 미진빌딩 4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광화문팀 실무책임자였던 Z씨의 증언.

『광화문팀의 주 임무는 정세분석과 여론조사였습니다. 언론인 출신의 엄효현(嚴涍鉉·현 한국방송개발원장)씨가 소장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현철씨가 책임자였습니다. 박철언(朴哲彦·현 자민련의원)씨와의 힘겨루기, 내각제 합의각서 공개파동과 그에이은 YS의 마산행, 집단탈당이란 배수진을 치고 벌인 노태우(盧泰愚) 당시 대통령과의 담판 등 고비고비마다 YS는 현철씨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현철씨는 자신이 정치적 판단을 내린 뒤 이를 밀어붙였다기 보다 각종 의견을 취합한 뒤 비교적 간명한 결론을 전달하는 식으로 YS를 보좌했습니다』

대통령후보 경선 뒤 사조직 재편이 있게 되면서 광화문팀은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에 흡수통합된다. 공식체계상 나사본은 서석재(徐錫宰·현 국민신당 의원) 의원이 최고 책임자로 돼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나사본을 움직인 사람은 현철씨였다. 애당초 나사본 결성 자체가 현철씨의 구상이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현철씨 그룹이 머리역할을, 서의원그룹이 다리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사본의 머리를 이끌게 된 현철씨는 대선과정에서 YS의 제1참모로 부상했고, 문민정부 출범이후에는 「막후 2인자」의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

현철씨가 막후실세로 절정을 구가했던 시기는 96년 4·11총선을 전후해서였다. 95년 6·27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민자당은 8월말 당직개편과 동시에 일찌감치 이듬해 총선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12월까지 공천윤곽을 마무리짓는다는 스케줄에 따라 공천 터닦기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당에선 새로 사무총장에 기용된 강삼재(姜三載) 의원이, 청와대에선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이 움직였다. 말하자면 투톱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일 뿐이었다. 실제 공천은 김·삼·종(김현철­강삼재­이원종) 트리오에 의해 결정됐다. 4·11총선 당시 공천 실무담당자였던 X씨의 기억.

『처음에는 김소장과 강총장의 생각이 상당부분 달랐습니다. 지역별로 우세·경합·열세 등으로 분류된 당 공천안을 가지고 김소장의 중학동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김소장이 생각하고 있던 안과 차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가 좁혀졌습니다. 당선가능성을 제1의 기준으로 삼자는데 어렵잖게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선가능성의 가장 큰 잣대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흥미로운 점은 여론조사 기능을 담당하는 당부설 사회개발연구소(사개연)가 있었음에도 YS가 현철씨에게 별도의 여론조사를 시켰다는 사실이다. YS는 애당초 사개연 여론조사결과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철씨로선 당선가능성 있는 사람을 미리 띄운 뒤 내보낼 수 있게 됐다. 말많은 정치권에서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 줄을 잡으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모든 상황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현철씨는 4·11총선을 통해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이루고 싶어했다. 신진기예들을 수혈해 정치권의 피갈이를 시도하려 했다. 그래서 대중인지도는 낮지만 스타성과 잠재력이 있는 인물들을 접촉해 「미리 가서 뛰어라. 나중에 여론조사해서 가능성있으면 공천주겠다」고 약속했다. 계속되는 X씨의 증언.

『4·11총선 공천을 통해 김소장이 했던 대표적 순기능은 문민정부의 개혁을 뒷받침할 새로운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천타천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긴 했습니다만, 공천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당과 김소장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인물들이었습니다. 김소장은 나름대로 개혁정권을 다지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여론조사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용한 것이 안기부 정보보고였다. 청와대비서관 출신 F씨의 증언.

『현철씨는 자신이 점찍었던 사람에게 공천을 주기 위해 안기부 정보를 역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조사란 게 워낙 인지도 높은 사람은 유리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안기부는 선거때만 되면 공천의 향방을 알기 위해 모든 안테나를 가동합니다. 이 안테나들에 「○○지역에는 ○○○를 예정하고 있다」는 역정보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특히 박빙인 경우에는 적지않은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도 버티기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고, 지역구를 넘겨주는 대신 전국구를 보장받은 인사도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경남지역 H씨와 K씨였다. 다선인 이들은 현철씨가 찍은 전형적 물갈이 대상이었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높게 나온데다 공천을 주지 않을 경우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겠다고 버텨 공천을 따냈다. 후자는 강원지역의 C씨였다. 역시 다선인 그는 현철씨를 면담한 뒤 『김소장이 지역구 대신 전국구를 주기로 했다』며 희색이 만면한 채 돌아다녔다.

그 해 12월5일 신한국당으로 당명까지 바꾼 민자당은 이듬해 4·11총선에서 지역구 121석과 전국구 18석을 합쳐 139석을 차지했다. 원내 과반수에 11석이 모자라긴 했으나, 지역구 66석과 전국구 13석에 그친 제2당 국민회의를 압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철씨로선 자신이 구상했던 정치권의 권력기반 구축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홍희곤·김성호 기자>

◎현철과 4·11공천/공천도움 50여명 현철여론 나빠지자 흔적지우기 바빠

문:한나라당 초선의원 가운데 96년 4·11총선 때 김현철씨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답:거의 없다.

문:한나라당 초선의원 가운데 김현철씨 공천받은 사람 손들어 보라면 몇명이나 들까.

답:아무도 없다.

4·11총선에서 신한국당(현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지역구 초선의원은 40여명에 달했다. 전국구 초선도 13명이나 됐다. 이들 대부분은 현철씨의 「재가」를 거쳐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현철씨로부터 일방적인 시혜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은 현철씨 기준에선 일단 「감」이 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 상당수와 현철씨는 서로에게 필요한 호혜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현철씨가 막강한 힘을 발휘할 때 이들은 노골적이건암묵적이건 현철씨의 존재를 인정했다. 현철씨와의 관계도 애써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철씨가 「문제인물」이 되면서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흔적지우기에 바빴다. 「현철인맥」어쩌고 하는 말만 나오면 한결같이 펄쩍 뛰게 됐다. 인심 조석변(朝夕變)의 체험현장이라 할만하다.

초선의원뿐 아니었다. 재선이상 의원 가운데서도 범(汎)민주계로 분류됐던 인사들은 대부분 현철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노소(老少)나 신구(新舊)가릴 것 없이 그랬다. 현철씨가 이들에 대해 독자적인 공천권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철씨의 「평가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은 어차피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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