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교체기마다 계절풍처럼 개혁풍이 찾아온다. 개혁풍의 강도와 경제관료의 정책발언권은 비례한다. 새 장관들이 의욕에 넘칠때 아이디어 보고서 한 장 올리면 곧장 정책으로 반영되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짜릿함도 이때가 제맛이다.50년만의 정권교체. IMF의 태풍. 눈앞에 다가온 21세기. 이처럼 3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개혁의 호기가 언제 있었던가. 경제개혁은 물러 설 수 없는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경제관료들은 그동안 민간주도니 세계화니 하는 구호를 주거니 받거니 해온 권력과 재벌의 위압에 정신박약아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관치경제라 했지만 재벌 한번 제대로 콘트롤 할 수 있었던가. 비자금사건의 와중에도 재벌총수들이 청와대에서 식사대접에 격려받고 나오지 않았던가. 관료들에겐 이제야 재벌들을 휘어 잡고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칠듯하다. 연일 쏟아지는 재벌관련 방침과 정책들이 예증한다. 그런데 이때가 개혁이 실패로 빠지는 가장 위험한 시점이라면 기우(杞憂)일까.
개혁에 대한 의지가 깊을수록 정책은 정교하고 신중해야한다. 더구나 정권초기엔 하나의 정책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바로 정부전체의 신뢰성 훼손이라는 치명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덫을 놓고 기다리는 기득세력들이 개혁세력보다 많은게 현실이다.
지난 2월말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재벌들에게 약 1주일의 여유를 주고 구조조정계획안을 내놓도록 했다. 불과 며칠사이에 각그룹들은 철저한 보안을 당부하며 구조조정안을 제출했다. 얼마뒤엔 은행감독원이 갑자기 은행들에게 거래 대기업들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토록 했다. 역시 며칠의 말미가 주어졌다. 최근엔 금융감독위에서 63개 재벌의 부채비율을 내년말까지 선진국 수준인 200%로 줄이도록 은행에 지시했다. 현재 우리 30대 재벌의 평균 부채비율은 450%.
재벌들에게 숨돌릴 틈도 줘선 안된다는 작정인 것 같다. 시원하다. 마침내 강도 높은 재벌개혁이 이뤄질 것임을 예감케 한다.
과연 그럴까. 결과부터 예단한다면 그 정부에 그 재벌이다. 수십년간 난마처럼 얽혀있는 수십개 계열사들의 구조조정과 재무개선계획을 단 며칠새에 내놓으라고 명령해 이를 받아든 정부는 천재가 아니면 바보다. 눈 깜짝할 새에 이를 만들어 내미는 재벌도 슈퍼맨이 아니면 거짓말쟁이다. 왜 그런가. 불가능한 일을 서류상으로만 가능한 것 처럼 서로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비밀을 당부하며 재무구조개선용으로 내놓은 카드가 모두 부동산들일 것은 뻔하다. 예컨데 1,000억원에 팔아서 빚을 갚겠노라고 내놓은 물건이 있다치자. 장부상 가격의 합리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현실적으로 절반 값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한번만 반문해보라. 서로 팔겠다고 내놓은 마당에 누가 누구 것을 산다는 말인가. 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팔린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벌의 생리는 개혁풍이 불 때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상태가 최상이다. 정부가 그런 빌미를 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눈을 돌려보자. 정부는 권한만 있고 책임은 도외시해온 재벌총수들도 상법상의 경영책임을 지우겠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전문경영체제를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말이 떨어지자 마자 명예회장으로 또는 2선으로 물러났던 고령의 창업주들이 이사등재를 하며 전면에 다시 나서고 있다. 현대그룹이 그렇고 대림그룹도 그렇다.그분들의 능력을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시계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다.
새 정부가 첫 단추부터 신뢰성을 잃지 않으려면 늦기전에 내놓은 정책들을 꼼꼼히 되짚어 봐야한다.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그만큼 알고 덤비라는 것이다. 정책이 발표된뒤 습관처럼 「완화」니 「수정」이니 「백지화」니 해서 혼란만 가중시킨 전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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