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초상 정확히 그리려하죠”/“좋은 연주자란 음악에 진심으로 종사하는 사람”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중인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52)씨가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20일 대전, 22일 수원에 이어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벨의 피아노독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라흐마니노프협주곡은 세계 굴지의 음반사 RCA데뷔작으로 지난해 러시아에서 전 4곡을 녹음, 1차로 1·2번 음반이 내한공연에 맞춰 나왔다.
그는 한 작곡가를 철저하게 파고 든다. 그동안 독주곡으로 무소르그스키, 라벨, 리스트, 협주곡으로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의 전곡을 녹음 또는 연주했다.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제쳐두고 굳이 미개척의 영역으로 고된 여정을 계속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곡을 이해하려면 작곡가를 알아야 하는데 한 두 곡 공부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밖에 안돼요. 그러다 보니 생애를 포함해 그의 모든 작품을 탐구하게 되더군요. 작곡가의 초상을 되도록 정확하게 그리려는 거지요』
「건반 위의 순례자」 백건우의 다음 순례지는 어디일까.
『지난 몇년간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바르토크의 피아노협주곡을 정리하는 데 힘썼습니다. 20세기 협주곡의 역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작곡가들이죠. 지금은 공백기예요. 결국 베토벤으로 돌아가야겠지요.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을 다시 공부하고 싶어요. 「월광」도 다시 하고 싶고. 얼마 전부터 20세기초 작곡가 부조니의 악보를 구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그의 피아노음악 전곡을 쭉 소개하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
미국 유학시절 처음 6∼7년간 그는 음악과 자신에 대한 회의로 방황했다. 음악보다 그림과 사진, 영화에 빠져 심각하게 다른 길을 생각한 적도 있다.「음악가가 안됐으면 사진작가가 됐을 것」이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조국을 떠나 고학하는 게 힘들었던 탓일까.
『제 자신을 찾고 싶었어요. 뉴욕에서는 국악을 더 많이 듣고 일부러 한복을 입었지요.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 앞으로 박차고 나갈 힘이 없다고 절감했습니다. 75년 광복 30주년 음악제에 초청받아 10여년만에 귀국했을 때 제 목적은 음악보다 뿌리찾기에 있었어요. 틈만 나면 절을 찾고 골동품가게를 들락거렸죠. 처음 학교 가던 날 걸었던 거리, 어릴 때 벚꽃구경하던 동산도 찾아가고…. 그랬더니 든든해지면서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고아같던 마음이 사라지더군요』
이제 그는 연주자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됐다고 말한다.
『어쨌든 저는 한국인이니까요. 핏줄을 속일 수는 없지요. 한국인이 서양음악 한 복판에 뛰어들 수 있을까 하는 콤플렉스가 많이 사라진 것같아요. 한국인이 서양악기 피아노를 다룰 뿐이고 음악은 세계인의 것입니다. 요새 부쩍 국제화를 강조하는데 그건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약하기 때문 아닐까요』
좋은 연주자란 어떤 것일까. 『음악에 대한 철학이 바탕되지 않으면 그저 음악을 직업삼거나 그것으로 인생을 꾸미는 것 밖에 안되지요. 음악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합니다. 음악에 진심으로 종사하는 자세라야 합니다. 파우스트 박사처럼 영혼을 팔면 안되지요』
그는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53)씨의 남편,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딸 (진희 眞希·21)양의 아버지로 행복하다. 침대에 누우면 달이 보이는 파리 교외의 아파트에서 2,000여개의 비디오테이프와 책에 둘러싸여 산다. 아내가 김치를 담글 때면 옆에서 파 마늘을 다듬어주고 요리를 좋아해 아내와 번갈아 상을 차린다. 신이 마음대로 쓰라고 충분한 시간을 주면 뭘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우리 둘이 방황을 할지 모르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윤씨는 『헤매는 게 아니고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해질녘 한적한 거리로 나오자 그는 딸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사이좋은 동무처럼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그의 순례는 외롭지 않을 것같아 보였다.<오미환 문화과학부 기자>오미환>
□약력
▲46년 서울생 ▲61년 줄리어드음악원 입학 ▲67년 나움버그 콩쿠르·69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 ▲92·93년 디아파종 음반상 ▲94년 프랑스 디나르의 에메랄드해변 페스티벌 예술감독 ▲95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96년 메시앙의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한국초연 ▲97년 리스트 편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한국초연. RCA 레코드와 계약, 라흐마니노프협주곡 전곡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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