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이원종 “사사건건 不和”/“얼굴마담”소문 한승수 시절부터 李 수석 힘쓰기 시작/현철,全·盧 구속보며 퇴임후대비 ‘법률가’ 김광일 천거/金 실장 주재회의 李 수석 불참… 한보때 동반 축출박관용(朴寬用·현 한나라당의원)씨 후임으로 한승수(韓昇洙·현 한나라당의원) 주미대사가 대통령비서실장에 발탁(94년 12월)된 과정에 관해선 지금도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실장은 문민정부가 내걸었던 「세계화」슬로건에 비추어 본다면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외국 유수대 박사출신에 현직 미대사였다. 거기에다 서울대 경제학과교수를 역임한 경제전문가였다.
하지만 그 이상을 따져 볼 때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장직은 무엇보다 정치력이 우선 요구되는 자리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비서실장 기용은 모양새 갖추기 성격이 없지 않았다. 자연 청와대내에 이런저런 쑥덕임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현철(賢哲)씨가 고른 「얼굴마담」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막내딸 혜숙(惠淑)씨와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앞의 소문은 현철씨가 비(非)정치인 출신을 비서실장직에 앉혀놓고 청와대 정치를 장중(掌中)에 넣으려 한다는 배경을 깔고 있었다. 뒤의 소문은 한씨가 주미대사 시절 미국에 머물던 혜숙씨를 잘 챙겨 준 덕에 김대통령의 관심을 끌게 됐다는 인사낙수(落穗)였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Q씨의 이야기.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한실장의 취약성을 반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실장 발탁은 외형은 그럴듯 했지만, 알맹이 없는 꽃꽂이 인사였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꿰고 있어야 하는데, 한실장은 그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또 일일이 대통령의 결재를 받지 않고서도 일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승수씨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문들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사통보를 받았을 뿐 발탁과정은 알 수 없었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관한 평가에 대해서도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가 못된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한승수씨가 비서실장이 되면서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실장 자신이 되도록이면 정치분야에 간여하지 않으려 한데다, 이수석이 현철씨와 직접 「핫라인」을 가동하며 일일이 정치문제를 챙기는 바람에 한실장의 역할공간은 「비정치분야」로 국한돼 버렸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 분위기로만 본다면 한실장 취임이후 비교적 조용한 시간들이 이어졌던 셈이다.
한실장은 그러나 취임 1년만인 95년 12월말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비자금 사건으로 같은 해 11월16일과 12월3일 노태우(盧泰愚)씨와 전두환(全斗煥)씨가 각각 구속됐고, 12월20일에는 연말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던 대대적 개각이 있게 된다. 11개 부처장관 경질과 청와대비서실 개편이 있었던 이 개각에서 한실장은 김광일(金光一)씨에게 비서실장 자리를 내주었다. 한실장 입장에선 이듬해 4·11총선 출마(강원 춘천갑)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퇴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엔 현철씨 나름의 정치적 원려(遠慮)가 담겨 있었다. 계속되는 Q씨의 증언.
『전·노씨 구속을 보면서 현철씨는 김대통령의 퇴임후를 생각하게 됩니다. 청와대를 물러난 뒤에도 어른을 모실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법률전문가여야 한다는 게 현철씨의 판단이었습니다. 아마도 전·노씨 주변의 법률가출신 측근들을 보면서 갖게 된 확신일겁니다. 그래서 천거한 사람이 김광일씨였습니다. 현철씨는 무엇보다 김씨의 능력을 샀습니다. 상도동 사람들이 문제삼았던 그의 불충(不忠)전력에 대해선 오히려 그점 때문에 김대통령에 충성할 것이란 역의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김광일씨의 청와대 진입으로 조용하던 청와대에는 다시 흙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상도동 가신그룹은 대체로 김씨 발탁을 못마땅해 했다. 그중에서도 이원종 수석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수석 입장에선 그럴만도 했다. 무엇보다 김실장은 3당합당을 정치적 야합이라 비판하며 YS에게 등을 돌렸었고, 나중에는 국민당 창당멤버로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회장과 손을 잡았던 「전비」(前非)가 있었다. 20여년을 오로지 YS 한사람만 모시고 살아온 이수석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허물이었다.
게다가 김실장은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개성이 뚜렷한데다 일욕심이 대단했다. 취임하자마자 각 수석비서관의 업무보고와 상관없이 비서관들이 직접 보고서를 작성해 자신에게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저인망식 비서실 장악작업이었다. 게다가 김실장은 정치인출신이었다. 당연히 정치문제를 직접 챙기려 들었다. 정무분야를 독자영역으로 굳혀왔던 이수석과의 충돌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Z씨의 증언.
『이수석은 김실장을 「국민당 출신」이라고 매사에 깔보았습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도를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가신의 편협성이라고 할까요. 김실장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튀는 성격인데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타입이어서 도무지 융화가 어려웠습니다. 이수석의 기득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죠. 더군다나 이수석은 내심 비서실장 자리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사이에 불협화음이 일 수 밖에 없었지요』
이수석은 김실장이 주재하는 아침 수석비서관회의에도 번번이 불참했다. 그바람에 윤원중(尹源重·현 한나라당의원) 정무비서관이 회의에 대신 참석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아침나절에 주로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으나 기실은 김실장에 대한 불만표시였다. YS는 그런 이수석을 달래기 위해 96년 8월개각 때 정무수석직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하는 배려를 해주었지만, 두사람간의 불화는 깊어만 갔다.
이어지는 Z씨의 증언.
『김실장 기용으로 정무수석직에 「눌러앉게」된 이수석은 스스로를 정치특보에 자리매김했습니다. 자신은 김실장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두사람간 알력의 에피소드는 청와대내에선 거의 매일 얘기거리였습니다. 심지어 회의도중 의견대립으로 육탄충돌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마저 돌았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부풀려진 뉴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팽팽히 대립한 건 사실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었지 밖으로 표출된 물리적 갈등은 거의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사람간 알력의 상당부분이 김실장과 「현철라인」의 대립으로 일반에 잘못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현철씨와 이수석의 「특수관계」를 유추해석한 결과이기도 했고, 오랜세월 언론과 가까이 지내온 이수석이 누린 「미디어 프리미엄」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현철씨와 김실장의 대립 운운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대립이란 대립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현철씨는 같은 반열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위인 YS의 눈높이에 있었다. 김실장이나 이수석이나 모두 아버지 사람이었고, 자기 사람이었다. 다만 이같은 입장에서 때에 따라 손을 들어준 대상을 달리했을 뿐이었다. 사사건건 치고받던 김실장과 이수석은 한보사태가 몰고온 청와대 비서실 개편(97년 2월말) 때 나란히 축출됨으로써 오랜 불화사(史)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리고 소산(小山)의 막후정치도 이와함께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홍희곤·김성호 기자>홍희곤·김성호>
◎이원종과 현철/74년 상도동 합류/출신高·대학 겹쳐 모든 업무 “협의”
이원종씨는 YS에겐 「원종이」였고, 현철씨에겐 「원종이 아저씨」였다. 상도동 사단의 안방멤버로, YS와 인생역정을 함께 한 몇안되는 인물들에게나 붙는 「호칭」이었다. 구(舊) 신민당 총재공보비서 시절부터 누구보다 YS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냈던 그는 언론이 가장 자주 인용한 YS의 입이자 얼굴없는 측근이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이씨는 74년 이모부인 김명윤(金命潤·현 한나라당 의원)씨 소개로 상도동에 몸담게 된다. 이후 한번도 곁눈 팔지 않고 YS를 지켰다. 그는 배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85년 이후 3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취급도 안해주는 세상이었지만 YS는 이원종씨만은 늘 곁에 두고 아꼈다.
이씨는 93년 12월 청와대 정무수석에 발탁됨으로써 정치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그는 「혈액형이 YS형」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군을 단심(丹心)보필했다. 문민시대의 언론통제관이란 악명도 이 과정에서 얻은 것이었다. 「혈죽(血竹)선생」이란 별명도 마찬가지였다. YS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핏대부터 낸다해서 「피」(血)와 「대」(竹)의 한자음을 따서 붙인 언론동네의 별호였다.
이씨와 현철씨는 특수관계였다. 동지나 상하관계라기 보다 혈육에 가까웠다. 출신학교(경복고고려대)까지 겹쳤다. 그는 거의 모든 주요업무에 관해 현철씨와 협의했고, 대부분의 사안에 뜻을 같이 했다. 언제나 주군 섬기기에 충실했던 그가 현철인맥이란 멍에를 지게 된 연유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