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의 한복판에 진보초(神保町)고서점가가 있다. 고서점가라고는 하지만 새 책을 파는 대형서점과 유명출판사 건물도 군데군데 들어서 있어,고서의 낡아가는 냄새와 신간의 잉크냄새가 뒤섞이면서 요란하지는 않으나 매력 있는 문화적 분위기를 이룬다.고서점 앞은 대중적이고 값이 헐한 문고본이 상자에 담겨 진열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전문서적과 희귀본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다.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일본인 남녀노소는 사철 이 거리를 산책하듯이, 혹은 사냥하듯이 누비고 다닌다. 제2의 도시인 오사카(大阪)의 한큐(阪急)3번가에도 비슷한 대규모 고서점가가 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두 개의 문학상을 포함하여 8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지난해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올해도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고 아쉬워하며 집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237인으로 1위, 다음은 영국(87인) 독일(72인)순이며 일본은 13위다. 아직 한 명도 받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러운 얘기다. 진보초 고서점가는 노벨상 심사에서 비(非)서구국가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8명이나 수상자를 배출한 저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지식의 축적과 재생산일 것이다. 고서점이 활기찬 것은 일본이 몇십년이 지나도록 충실하고 가치있는 책을 만들어 왔다는 증표이다. 책은 문학 예술 과학 사상 철학등 지식과 교양의 매개자이자 전수자이다. 일본의 양서(良書)야말로 그들의 경제와 문화를 키워온 모성이었다.
한국에는 일본식의 고서점이 드물다. 대신 철 지난 교과서와 참고서, 대중서적등을 파는 「헌책방」이 있다. 한국에 「고서점」이 드문 것을 의아해 하던 일본인들은 근래 자기들 보다 큰 규모의 교보문고 영풍문고등이 문을 열고, 그곳으로 인파가 몰리는 것을 보며 놀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겐 희망을, 외국인에겐 외경심을 주던 우리 출판계는 IMF사태 후 벼랑에 섰다.
종이값이 폭등하자 신간 발행부수도 줄고,책판매량은 30∼40%나 떨어지면서 유통이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또 대형 책도매상들이 부도를 내자, 그 위기가 출판사 인쇄업 제지업등으로 빠르게 덮쳐 왔다. 급기야 출판인·문인들은 『저작활동이 위축되어 책의 죽음, 문학의 죽음을 빚고 나라의 미래까지 파탄시킬 것』이라고 다급하게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김대중 대통령은 출판업계에 500억원을 특별지원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전 출판계는 연쇄붕괴의 위기를 넘겼다.
정부가 지식산업의 단절과 절멸을 막기 위해 출판계에 특별구제금융을 주기로 한 것이다. 출판인들은 이제부터 정말 좋은 책 만들기와 구조개혁에 나섬으로써 국민적 여론에 답해야 한다. 지금 대형서점에 가서 도서안내용 컴퓨터를 쳐 보라. 좀 팔린다고 해서 「삼국지」를 조금씩 바꿔 펴낸 출판사가 40개가 넘는다. 출판계는 이러한 인기도서의 중복출판과 한탕주의등 염치없는 관습을 단호히 떨쳐내고 유통구조를 합리화하는 뼈 아픈 자구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도 미래지향적인 출판및 도서관 정책을 확고히 추진해야 한다. 각급 도서관을 많이 세우고 현재 선진국의 몇십분의 일 밖에 안되는 도서관의 도서 구입비를 선진국처럼 확보해 줄 때, 출판과 문화가 살고 경제는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1960∼70년대에 우리의 산골 마을까지 전깃불이 들어 왔듯이, 이제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도서관이 세워져 밤늦도록 불빛이 환한 것을 보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