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능력·식견 부족,외국인에 동문서답『한국정부가 하반기부터 모든 공산품에 대한 가격표시제를 폐지키로 해놓고 4월1일부터 주류가격표시제를 시행키로 한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요. 한국 정부는 시정할 의사가 없습니까』(제리 화이트 IDK사장) 『글쎄요, 이것은 재정경제부에서 답변할 사항인 것 같군요』(국세청) 『검토후 문제가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재경부) 『관계부처에서 충분한 검토를 하겠습니다』(산자부)
18일 오전 8시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국내진출 외국기업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합동간담회는 시종일관 이런식으로 진행됐다. 간담회에 참석한 미국 및 유럽연합(EU) 상공인 50여명은 시간이 모자라다는 듯 질문과 고충을 마구 쏟아냈다. 하지만 정부측은 질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족, 해당사안에 대한 정책파악 미비 등으로 알맹이 없는 답변만 늘어놓았다.
독일 화학업체 바스프 코리아의 아드리안 폰 멩거슨 사장은 회의도중 기자들에게 다가와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은 뒤 이렇게 하소연했다. 『나는 상당수 한국인들이 정리해고를 마치 외국기업인들이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려를 나타내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정부측 관계자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동문서답만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시작되면서 정부와 민간단체가 이곳저곳에서 유행처럼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각종 정책설명회를 열고 있다.
그러나 설명회가 오히려 국내 진출 외국기업인들을 이렇듯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주최측의 비전문가적 식견과 알맹이 없는 내용이 『혹시나…』하며 참석했던 외국 기업인들에게 『역시나…』하는 실망만 안겨주고 있다.
지난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미국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설명회 역시 동문서답과 무성의로 끝난 것은 마찬가지. 주한미대사관의 랜돌프 플리드만 경제담당서기관이 『한국의 무역과 금융전반에 대한 통계지표를 파악하기 힘들다. 전경련이 파악하고 있는 경제 통계수치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전경련측은 언론에 보도된 경제·사회적 상황만을 줄줄이 늘어놓다가 『구체적인 경제지표는 없다』고 답변을 했다.
또 국내 대기업들의 빅딜과 구조조정과정에 대해 기대에 찬 한 미국기업인의 질문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외국인들에게 「입으로만 떠드는 한국의 경제개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IMF시대를 맞은 우리 경제는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투자 없이는 회생하기 힘들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유치에 앞장서고 있는 정부와 재계에는 정작 외국인들을 상대할 만한 언어능력과 전문적 식견을 지닌 인력이 드문 상태다. 정부는 「외국인 투자천국」을 외치기 전에 국내 산업과 외국인 투자자간의 다리역할을 할 전문인력을 시급히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규투자 유치는커녕 이미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인마저 모두 떠나보낼지 모른다.
이른 아침부터 2만5,000원씩을 내고 간담회에 참석했던 외국 기업인들은 『도대체 오늘 얻은게 뭐냐』며 『언어소통의 문제인지, 관점의 차이인지, 성의의 부족인지 모르겠다』는 푸념만 잔뜩 늘어놓은 채 돌아갔다.<남대희·장학만 기자>남대희·장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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