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반, 서예가 일중 김충현의 서실 「일중묵연」에서의 일이다. 하루는 거실의 문하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중이 일본외교관의 부인을 내실로 들여 글씨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고관부인들이나 명문가 자제도 그저 덤덤히 대하던 양반이, 더구나 경술국치 직후 음독자결한 오천공 김석진의 손자라는 양반이 이럴 수가. 일중은 말했다. 『내가 어찌 제자들에게 일본말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겠나』 제자들과 말술을 즐기기도 하고, 내키면 글씨도 잘 써주던 그는 가릴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일중은 서예계의 거목이다. 예서체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떨쳤고, 「우리 글씨 쓰는 법」 「우리말 중등 글씨체」등을 통해 한글교육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아호 「일중」은 중심은 하나여야지 두 개면 근심(환)이 된다며 선친이 지어준 것이다.
그의 나이 77세, 희수다. 세월은 만년 서생같던 얼굴에 검버섯을 피웠고, 파킨슨병으로 그는 좋아하는 술을 하지 못한다. 요즘엔 그보다 천만배 더 좋아하는 글씨도 못 쓴다.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일중 김충현전」 개막식에는 각계인사 500여명이 몰려 서예관 개관 이래 최대 성황을 이뤘다. 유명인사들이 많아 『예술원 회원이 이렇게 찬밥 대우 받는 일도 있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선생님, 한 평생 서예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그는 답했다. 『근을 잃고서는 살 수 없다. 신을 잃고서는 서지도 못한다』
그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위당 정인보의 시를 옮긴 현충사의 충무공비를 꼽는 일이나 연초 「정치민안」이라는 휘호를 한 것은 모두 부지런하지도,믿을만 하지도 않은 요즘 세태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는 제자였던 한 여당의원의 귀에 대고 나지막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똑바로 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