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서도 인정받은 국제적 원칙주의자/28년간 강직함 무기로 동양여자 차별 극복/2,700여명 인사·복지정책 담당 중요직에 올라/“강대국 편향 복지규정 개혁이 제일 큰 보람”지난 연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울 때 갑자기 화제가 된 여성이 있었다. 이수성(59) 전 국무총리의 여동생이라서 더 눈길을 끈 이수전(58)씨. 그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외환위기 타개를 위해 협조를 요청한 IMF 전문가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씨는 66년부터 94년까지 IMF에서 28년간 근무하며 동양여성으로는 드물게 행정국 후생복지과 수석 후생복지정책담당관에 오른 인물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경제계 엘리트집단인 IMF 직원 2,700여명의 인사와 복지정책에 대한 제반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이다.
흔히 서구사회는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국제기구에서는 채용, 승진에 출신국의 경제력과 분담금이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런데도 한국에 고속도로조차 없었던 60년대에 국제기구에 들어가 이런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원칙과 실리를 신봉하며 올바르지 않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은 고집 덕분』이라고 이씨는 말한다. 지금은 미국에서 은퇴생활중인 당시 행정국장 롤랜드 텐코니씨가 『이씨는 후생복지과의 기둥이었고 복지정책 실무에 관한한 이씨의 말이 성경(holy book)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스스로를 「원칙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칙보다 융통성을 중시하지만 국제기구에서 살아남는데는 원칙만큼 강한 무기가 없다』고 말한다. 복지업무를 맡다 보니 상급자들의 압력이 심심찮았다. 한국인상사가 부당하게 복지연금을 받겠다며 청탁한 적도 있었다. 이씨의 대답은 물론 거절. 『동포끼리 너무 하는 것 아니냐, 누가 안다고 그러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씨는 『제가 압니다』하고 말했다. 93년까지 IMF 비서실에서 25년간 일하면서 이씨를 지켜본 한동대 생활관장 김경회(57)씨는 『속은 인정이 넘치지만 일처리에서는 놀랄 만큼 강직한 분이다. 우리 국력으로는 바라보기 어려운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강직함이 바탕이 된 실력 덕분』이라고 평했다.
이씨가 IMF에 들어간 것은 한국은행 근무경력이 큰 작용을 했다. 남자들도 직장을 얻기 힘들던 61년, 이씨는 한국은행 여행원 공채 1기로 들어가 수출과와 조사과를 거쳤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다 보니 개발도상국 자금지원차 내한한 IMF 조사단을 수행하는 일이 많았다. 이때만 해도 국제기구에서 일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계기가 된 것은 결혼. 이씨는 은행동료인 정재완(수원대 경상대학장)씨와 장래를 약속하고 동반유학을 결정했다. 프레도니아 뉴욕주립대학원 영문과에 입학자격을 얻어 66년 유학길에 올랐지만 생활비도 빠듯해 2주만에 공부를 접었다. 「남편이라도 먼저 공부시키자」고 결심한 이씨는 한국은행시절 알고 지내던 IMF 직원에게 전화를 했고 은행 근무경력 덕분에 인사기록계 직원으로 채용됐다.
IMF에서 그는 무섭게 일했다. 뉴욕에서 공부하는 남편과 떨어져 워싱턴에서 근무하는 「유학생과부」였지만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반납하며 열성을 다했다. 이런 열성으로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국제기구에서 비서, 사무보조를 맡는 일반직과 전문직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국가간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국제기구에서 동양계 여성으로 차별받은 적도 많았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인사고과에서 밀려 두 차례나 승진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일의 선후를 따지면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동양여자가 까다롭게 군다』며 화를 내는 남성상급자들도 있었다.
이씨는 차별을 바꾸는 정책을 만들며 차별을 이겨냈다. 92년 각종 복지수당을 개발도상국에도 유리하게 개정토록 기안한 일은 지금도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당시 교육수당은 직원자녀들이 모국어로 운영되는 학교에 가야만 받을 수 있었다. IMF가 있는 워싱턴D.C.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학교 밖에 없었다. 가족수당도 수혜자가 자녀로 국한돼 한국인들은 부모를 모셔도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했다. IMF가 이런 서구 강대국중심의 복지규정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도 혜택을 볼 수 있게 바꾼 것은 이씨가 노력한 결과였다.
이씨는 94년 IMF를 퇴직한뒤 조지메이슨대 경제학교수로 있던 남편이 수원대 경상대학장으로 부임하면서 지난해 9월 귀국했다. 31년간 미국서 살다보니 아직도 지하철계단을 내려가다가 「오늘따라 한국말이 많이 들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이씨는 이 달부터 수원대 어학원에서 실무영어를 가르치고 있다.<이성희 기자>이성희>
◎이수전의 국제무대 생존전략/“학위취득 등 경력관리 중요”
국제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해 이씨는 경력관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제기구에서는 학위를 중요시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만이 인정받는다』는 이씨는 적절한 때 석사나 박사학위도 받으라고 조언한다. 시작은 일반직으로 해도 계속 공부해 석사 학위 이상을 소지하면 전문직으로 승진하기가 훨씬 쉽다고. 이씨 역시 행정국 근무 당시 상사인 테렌스 체키(미국연방준비은행 부총재)씨가 법과대학원을 다니라고 권했지만 바쁘다며 실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외교적인 표현이나 관행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이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기분 내키는대로 말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국제무대에서는 사소한 불평도 외교적인 용어를 총동원해 부드럽게 말할 줄 알아야 전문가로 평가받는다』고 지적한다.
국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일하려면 모든 의결처리과정에서 내 의견은 무엇이었다는 점을 기록해 두는 습관도 필수적이다. 『기록이 없으면 나중에 일이 잘못됐을때 상사로부터 책임을 전가당하기도 한다』는 이씨는 심지어 입사 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추궁을 당한 적이 있다고 들려준다. 이때문에 모든 일에 개인의견이나 건의사항을 문서화했다. 『이 습관은 좋은 의견을 제시했을때 공적을 인정받게도 한다』고 말한다.
◎국제기구의 한국 여성들/유엔기구 12명·IMF 6명 활약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유엔을 비롯한 36개 국제기구에 진출해있는 한국인들은 265명이다. 한국인이라도 다른 나라 국적을 갖고 있거나 비정규직원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이중 정부에서 파견한 인력은 63명이며 9명은 96년부터 외교통상부가 공모, 국제기구에 파견한 초급 전문가(JPO)들이다. 나머지는 현지채용 등을 통해 입사한 사람들. 여성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곳은 세계은행(IBRD)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진출이 가장 활발한 국제기구이기도 한데 68명중 35명이 여성이며 직급도 컨설턴트 이코노미스트 등으로 다양하다. 그 다음은 유엔과 그 산하기구로 48명중 12명이 여성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는 계약직 4명과 재경부 파견관리 3명을 포함해 모두 23명이 일하고있는데 이중 여성은 6명이다. 비율로 본다면 국제기구중에서도 경제관련 기구에 여성들의 진출이 더 활발한 셈이다.
유엔에서 활동하는 여성중 최고위직은 유엔개발계획에 근무하는 한석란씨와 아·태경제사회이사회에 근무하는 유자경씨로 P4급(우리나라로 치면 중앙부처 과장급). 세계은행에는 김훈애씨와 김애형씨가 세계은행 직급 중에도 꽃이라는 시니어 이코노미스트와 이코노미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약력
40년 광주 출생
57년 경기여고 졸
61년 이화여대 영문과 졸
61∼66년 한국은행 수출과, 연관분석과, 국제수지과 근무
66년 프레도니아 뉴욕주립대 유학차 도미.
IMF 인사과 직원으로 입사
77년 IMF 인사기록계장
81년 IMF 후생복지법 집행계장
91∼94년 IMF 후생복지과 수석 후생복지정책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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