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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 정치(문민정부 5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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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 정치(문민정부 5년:1)

입력
1998.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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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 현철 귀국 “비극의 씨앗”/YS,94년 봄 아들 보내기 싫었지만 미로 보냈는데 김기섭씨 “SOS” 급전에 한달도 채안돼 발길돌려/3년후 YS “그때 안돌아왔으면…” 통한의 눈물잠정 중단됐던 「실록 청와대」가 「문민정부 5년」으로 되살아 납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대는 영욕이 극단적으로 교차한 당대사입니다. 한국일보는 묻혔던 사초를 발굴한다는 각오로 문민실록을 작성해 나갈 것입니다. 문민실록의 착점은 김전대통령의 둘째아들 현철씨입니다. 두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자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문민정부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잉태됐습니다.<편집자 주>

『현철이 그놈,두번이나 외국에 내보냈는데… 보내면 돌아오고,보내면 돌아오고… 자식은 참 마음대로 안됩디다』 97년 3월 중순 청와대 집무실. 신한국당 박관용(현 한나라당)의원과 독대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늘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G남성클리닉 원장 박경식씨의 「김현철 국정개입 테이프」 폭로로 정국이 벌집쑤신 듯하던 때였다. 특유의 육감으로 아들의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긴 불행의 짧은 전조에 불과했다. 두달 뒤 김대통령은 비슷한 내용의 탄식을 회한의 눈물 속에 다시 터뜨리게 된다.

『그때 안 돌아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낀데…』 김현철씨가 구속된 다음날인 97년 5월18일 청와대 관저에서 신한국당 김무성(현 한나라당)의원과 마주 앉은 김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현철씨의 수감을 가슴 아파했다.

아버지와 아들­. 찬란히 피었다 허망히 스러진 문민정부의 「두 실세」. 부자지간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대통령과 그의 차남. 「김영삼과 김현철」은 문민정부를 통시적으로 꿰뚫는 키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전대통령이 말한 「두번」과 「그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그 「두번」은 바로 94년 봄과 96년 여름이다. 94년 봄은 미국 서부,96년 여름은 일본 등지로의 외유였다. 「그때」는 그중에서도 94년 봄을 가리킨다. 김전대통령이 특히 「94년 봄」에 대해 통한의 눈물을 쏟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삼 정권 초기 2년간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Q씨의 증언.

『현철씨는 당시 미국에 건너가 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들이 자꾸 나돌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외국에 나갈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휴가 가는 형식으로 가족까지 데리고 미국 서부로 갔습니다. 살 집도 알아보고, 자신이 다닐 학교도 물색했습니다. 그런데 한달도 채 못돼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철씨와 가까웠던 국내 모 인사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자 미국의 현철씨에게 SOS를 친 것이었습니다』

94년 봄에 현철씨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으리란 YS의 생각은 「모 인사」의 정체와 적지 않은 관련이 있을 듯 싶다. 김영삼 정권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의원의 회고.

『94년 5월에 차관 경질인사가 있었습니다. 이영덕 총리와 이홍구 통일부총리 임명에 따른 후속 인사였죠. 민정수석실에서 조사해 온 것을 토대로 대통령께 보고하던 중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 부분에 이르러 「김실장을 바꿔야겠습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이미 김실장에 대한 좋지 않은 보고들이 많이 올라와 있던 상태였습니다. 대통령도 「알았다.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인선작업을 하는데,대통령이 김실장 교체와 관련해선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김실장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더니 「응,그냥 놔둬」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면권자가 그렇게 말하는데,토를 달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박의원은 당시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무언가 있구나」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정작 박의원은 모르고 있었지만,그 「무언가」는 다름아닌 현철씨의 급작스런 귀국과 그에 이은 부자간의 충돌이었다.(이 과정에 대해선 다음 회에 상술한다)

애써 내보낸 현철씨가 귀국해 김기섭씨 경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YS의 회한은 대단했을 터다. 김기섭씨가 이른바 「소산 게이트」의 공동 주연격이었던 점을 떠올리면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였을까.

외유와 관련된 현철씨 자신의 주장.

『91년 5,6월 경이었을 것이다…(중략) 아버님을 성심껏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을 지워드린 것 같으니 나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님의 반응이 뜻밖이었다…(중략) 아버님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네가 왜 그래야 되느냐고 반문하셨다. 「자식이 아비를 돕겠다는데 그게 무슨 죄냐. 네 자신이 원해서 나가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게 아닌 한 허락할 수 없다. 더구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갔다더라는 뒷소리가 날 것이다」 아버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김현철저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

YS는 한편으론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 외국으로 내보내려 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질긴 애정의 끈으로 현철씨를 묶어두고 싶어했다고 「상도동사람들」은 증언한다. 현철씨에 대한 김전대통령 부부의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손명순 여사는 물론 김전대통령도 현철씨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근엄의 가면을 쓰려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상도동 비서출신 Z씨가 들려주는 예화 두 토막.

『현철씨가 87년 미국 USC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딴 뒤 귀국한 것은 어머니 손여사의 뜻에 의해섭니다. 데리고 살던 막내딸 혜숙씨를 출가시킨 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손여사가 김전대통령에게 간청해 현철씨를 불러들인 것이죠. 부모의 애정이 결과적으로 현철씨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를 제공한 셈이라고 할까요』

『대통령 당선 뒤 청와대에 들어갈 때에도 현철씨 문제로 가족내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손여사는 「외로워서 못살겠다. 자식 하나라도 옆에 두고 살자」며 현철씨 가족을 청와대로 데리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김전대통령도 적잖이 고심했습니다만 결국은 대통령 부처만 입주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박관용 의원의 이어지는 증언도 김전대통령이 현철씨에게 가졌던 애정의 크기와 성격을 정물화 그리듯 보여준다.

『청와대 입주 초기였습니다. 청와대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홍인길 총무수석이 「현철이에 대한 김대통령의 애정이 각별하니 다른 이야기는 다 하더라도 현철이 이야기만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충고해 줍디다. 가신출신이 아닌 나로선 상도동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혹시실수를 할까봐 홍수석이 선의의 충고를 해 주었던 겁니다. 홍수석 뿐 아닙니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상도동 시절부터 현철이 이야기를 입에 올려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며 입조심을 당부했습니다』

상당수 상도동 사람들은 현철씨의 국정개입이 가져올지 모를 어두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언뜻언뜻 예감하면서도 권력이 뿜어내는 자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반몰락은 이렇게 비극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었다.<홍희곤·김성호 기자>

◎YS의 유별난 편애/독선적 스타일이 ‘소산’ 키웠다

YS는 슬하 5남매(2남3녀)중 현철씨에 대해 유별난 애정을 가졌다. 외모뿐 아니라 성정마저 자신을 쏙 빼닮은 현철씨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치참모 역할까지 수행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편애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김전대통령의 가족사를 좀더 더듬어 내려가다 보면 보상심리의 발현이라는 다소 고약한 환증과 맞닥뜨리게 된다. 탄압받는 야당지도자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한 상쇄욕과 장남 은철씨를 통해선 충족될 수 없었던 아버지로서의 욕심이 뒤엉킨 결과였다.

상도동 사람들이 지적하듯 김전대통령과 현철씨의 관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김전대통령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YS는 오랜 야당 생활로 자식들 취직하나 변변히 시키지 못했다. 딸들 중신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장남 은철씨 결혼식 때에는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애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현철씨에 대해선 유난히 애정이 깊었다. 장남 은철씨가 선천적으로 신경이 섬약해 아예 남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던데 비해 현철씨는 아버지의 정치적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게다가 살벌한 정보정치하에서 완벽하게 비밀보장이 되는 최고의 참모 역할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YS의 독선적인 통치스타일도 현철씨의 역할증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YS정권 내내 청와대 수석들과 장관들은 대통령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민주계 가신들조차 껄끄러운 말은 현철이란 통로를 이용했다. 권력으로 줄달음치는 부나비들이 자연 현철씨 주위로 몰려들었고,현철씨 자신도 권력의 단맛에 눈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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