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쾌락·주제의식 불구 주인공 캐릭터 단순성은 ‘하이틴 소설’에 가까워/싸구려 통속적 장면도”「타이타닉」을 놓고 정색을 하는건 좀 우스꽝스런 일이다. 개구장이 앞에서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과 유사한 희극성이 거기엔 있다. 그러나 「타이타닉」을 보러 관객이 몰려드는 현상은 우습지 않다. 상영된지 4주일만에 서울에서만 70여만명이 보았다니. 어떤 대목이 그토록 많은 관객을 유혹했을까?
영화는 타이타닉에 승선한 귀족처녀와 가난뱅이 화가청년의 로맨스가 뼈대를 이룬다. 전에 나온 것과는 달리 타이타닉 좌초의 비극보다는 로맨스에 힘을 둔 형국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인 미소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매력이 관객유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확실히 요즘 스크린에는 10,20대가 생을 걸만큼 멋드러진 청춘스타는 없다. 브래드 피트의 얼굴엔 이제 서른 다섯의 음영이 드리워졌다. 톰 크루즈는 성실하나 촌스런 티를 벗지 못했다. 리버 피닉스의 빈자리를 채웠던 키애누 리브스 역시 변해만 간다. 그 공란에서 치솟은 이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일지 모른다. 홍안의 미소년 디카프리오의 팬이 소녀층에 국한된 건 아니겠으되 객석을 메운 저 중장년들을 해석하기엔 역부족이다. 이 「귀염둥이」는 풀코스 식사의 맨 앞자리에 식욕을 돋우러 나온 맛깔스런 전채요리 내지는 야채 스프에 불과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타이타닉」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를 승선하는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먼저 시각적 쾌락을 준다. 호화가구와 드레스 회화 기계장치 사이를 넘나들며 중세의 고풍과 현대의 생동감이 충돌한다. 어느 정통드라마도 따라가기 힘든 풍요로운 미장센(화면구도)이다.
그리고 청각적 쾌감이 있다. 시각적 댄디즘에 진력을 느낄 즈음 영화는 타이타닉의 삼등칸으로 내려가 삼류 승객들의 축제를 통해 삶의 또다른 활기를 들려준다. 가죽북과 원목 바닥이 둥둥 울려주는 원시적 해방감, 소박한 서민적 일체감. 여기에 촉감이 빠질 수 없다. 무엇보다 영화의 배경이 세기초의 바다가 아닌가. 도전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대양의 장엄함, 숭고하게 열린 수평선의 단순함, 정면으로 부딪혔다 머리칼 사이로 격하게 빠져나가는 바람의 씩씩함.
여느 블록버스터(히트영화)와 질이 다른 스펙터클이기는 하다. 자고 일어나면 복제 인간들이 들이닥치고, 걸핏하면 우울한 묵시록에 비전을 차압당하던 관객들이 보기에 카메론 군단의 기획은 심히 인간적이다. 그리고 당연히 준비된 서사의 박진감은 또 어떤가. 청춘의 들끓는 열애가 있고, 사랑의 도피가 있고, 목숨을 건 희생과 정직한 승리, 자유를 향해 요동치는 심장이 있다. 덧붙여, 바다의 열정을 노래하다 문명의 교만을 탓하고 해저의 허무를 읊조리기를 잊지 않는 심오한 주제의식이 이 정찬의 대미를 장식한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다. 후식으로는 깔끔하게 포장된 휴머니즘이 마련돼 있다.
쾌적한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여행을 모독하려는건 아니다. 「타이타닉」의 「구경」을 비판할 생각일랑은 전혀 없다. 이런 영화를 죄악시할 생각도 없다. 분격할 만큼 그렇게 영리하고 민첩한 영화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재미를 누리고자 하는 관객의 마음에 나는 충분히 공감하는 쪽이다. 사람들은 때로 유치한 순정을 보고싶을 때가 있는 법이고, 더더구나 세상이 염증으로 가득한 요사이에는 감상극(멜러)조차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단 이 멍청한 「가장무도회」를 확대해석하는 데는 전혀 동의할 마음이 없다. 독선적인 귀족 대 가엾은 하층민, 악당 부르주아 대 선량한 예술가로 딱딱 갈라지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그 명백한 멍청함 때문에 차라리 흉볼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녀주인공 잭과 로즈의 캐릭터의 단순성은 그냥 넘길 수 없다. 현대의 자유의지,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의 봉건적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할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실은 멜로드라마의 교과서에서 베낀 「뿌리없는 남자」와 「에미의 뜻을 거역하는 딸」일 따름이다. 아니, 하이틴 소설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80여년후 타이타닉의 잔해를 탐사하다 여주인공 로즈할머니를 발견한 해저탐사팀이 로즈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장면은 연출이 어느 정도까지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진보를 가장한 싸구려 통속이고 위선의 극치다. 더러 재미있지만 한편 권태롭고 멍청한 것, 이게 통속이다. 통속은 오락을 재생산하지만 그건 생산이 아니다. 물론 모를 사람이야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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